그리스의 끝, 마니 - 펠로폰네소스 남부 여행기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패트릭 리 퍼머 지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세상에 이렇게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가 있는 건가? 무려 1년 반이나 걸리다니. 물론 내내 읽은 건 아니고 읽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앞에 읽은 내용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스의 끝 마니>는 어느 신문에 실린 황현산 선생의 추천으로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래 읽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나마 책 앞에 읽기 시작한 날짜를 적어 두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언제부터 시작했는지조차 몰랐으리라.

 

전쟁영웅의 마니 여행기

 

이 책을 읽다 보니 내가 그동안 안다고 생각해왔던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영국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20세기 최고의 여행작가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는 패트릭 리 퍼머는 이번 여행기의 목적은 코카콜라와 철의장막이 한창 씨름을 벌이던 냉전시기에 모든 장소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그리스의 오지 마니를 찾아 작가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명예 크레타인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정도로 그리스애호가인 작가가 그리스인들의 삶의 터전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서구 문명의 원류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부재했다면 펠로폰네소스 남부 특히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패트릭 리 퍼머의 마니 지방 여행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늘날 그리스는 유로 위기를 촉발시킨 주범으로 몰려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냉전 시대에는 서방세계와 철의장막으로 대변되는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이 첨예하게 맞붙은 곳이기도 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50년대 후반에도 이미 마니 지역 고유의 문화들이 사라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상황은 또 어떤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수세기에 걸친 터키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에 대항해서 유구한 민족성을 지켜낸 유럽문화의 사실상 최남단에 위치한 마니 지방에 대한 작가의 찬가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리 퍼머 작가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명한 유적지 등은 애써 피해 다니고 있는 듯 싶을 정도로 카이크와 노새의 힘을 빌어 에게 해와 마니 지방의 곳곳을 누빈다. 만가와 혈수(血讐) 그리고 이방인과 나그네를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환대하는 이중적인 면모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스케치는 정말 일품이다. 아울러 그네들의 삶을 근거리에서 관찰해서 기록으로 옮긴 실력은 최고의 여행작가라는 표현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정말 한 나라 문화와 그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언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크레타 군정장관 하인리히 크라이페를 사로잡는 쾌거를 올릴 정도로 크레타의 평범한 양치기로 위장하고 원주민 행세를 하며 익힌 자신의 언어 실력을 자신의 마니 여행기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리 퍼머는 역사에 기록된 정사 외에도 1696년 크레타의 마지막 거점 칸디아가 투르크 손에 떨어지자 비틸로 지방의 유력한 두 가문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토스카나 볼테라 지방과 코르시카 카제스에 정주하게 된 일단의 사건들도 세심하게 다루면서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단상도 전해준다. 종교적 색채가 다른 적대적 지역 주민들과의 통혼 그리고 그리스 정교도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는 순간 역사 속에서 소멸해 버렸다는 냉엄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전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여행기의 후반에 저자가 공들여 전해주는 서방 세계에 전파된 기독교 정신과 그리스 철학의 만남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을 들여다 보면 한결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인들의 세속적 삶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원래 다신교의 나라였던 그리스에서 제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기독교에 무리 없이 편입되었는지 빼어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입증한다. 어쩌면 그리스 철학의 개입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보편 종교로서 서방 세계를 대표하는 종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성삼위일체를 비롯한 핵심 기독교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정교회 성인전에도 없는 기상천외한 포용력을 발휘해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과 이교도 종교관습들이 그리스인들의 신앙체계에 침투했다는 지적도 흥미로웠다. 그리스 문화를 계승한 비잔티움 제국의 교부와 사제들이 추구한 추상적 개념의 교리추구 그리고 서방교회에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필리오케 같은 개념을 동원해서 르네상스로 접어들고 있던 인간을 신의 영역으로 이끈 서방 라틴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고 작가는 설파한다.

 

개인적으로 <그리스의 끝 마니>의 핵심은 <성상> 챕터라고 생각한다. 라이아의 어느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 쇠락한 프레스코화를 대면한 작가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마니 사람들과 불가분에 있는 정교회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스 정교회 세계의 마지막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리 퍼머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보다 고대의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명칭을 고집한다)이 정복욕에 불타는 술탄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학문 발전은 중단되었고, 교회의 생존이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그 결과, 가뜩이나 보수적이었던 정교회는 르네상스 발흥기의 서방과 비교해서 문화, 예술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오랜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 한 번 작가의 심오한 내공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서방 가톨릭 세계가 오랜 불화를 이겨내고 이교도보다도 더 증오하게 된 동방 정교회를 도와 오스만의 침공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수호할 수 있었다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라는 가정까지 하는 걸 보면서 현대판 로미오이의 한 단면을 엿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칼라마타 부근에서 출발해서 타이게토스 산맥을 넘어, 남쪽 끝의 마타판 곳을 지나 마침내 기티오에서 리 퍼머의 마니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950년대에 나온 <그리스의 끝 마니>를 읽으면서 과연 패트릭 리 퍼머가 지난 세기 최고의 여행작가라는 표현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됐다. 느릿느릿 해안선을 따라 운행하는 증기선이나 노새의 힘을 빌어 도보로 마니에 산재한 크고 작은 마을들을 섭렵하며 마니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체험을 총동원해서 그들의 삶에 대한 단상을 풀어내는 솜씨가 정말 탁월했다. 단기 여행으로 피상적 체험기를 풀어내는 근래 유행하는 부박한 여행기와는 질적으로 차원으로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마니와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리 퍼머는 심지어 마니 지방에 사는 동식물에까지도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현대판 오디세우스 패트릭 리 퍼머의 마니 주유기는 비록 기티오에서 끝났지만, 또 다른 그리스 여행기인 <루멜리>를 기대해 본다. <그리스의 끝 마니>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여행기였다. 읽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는 그런 독서의 시간들이었다. 대단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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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2 0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서양미술사>를 10년째 읽고있습니다 ㅜㅜㅎ

레삭매냐 2018-08-12 09:12   좋아요 1 | URL
책의 분량이 두툼하긴 했지만 그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출판사에서 <루멜리>도 내주었
으면 좋겠는데 아마 난망해 보이네요.

카알벨루치 2018-08-12 09:18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은 제가 모르는 책만 일부러 골라 읽으시는거 아니죠? ^^너무 좋아요! 모르는게 천지라는게...즐독 열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