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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ㅣ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평점 :
<전쟁의 슬픔>은 내가 읽은 첫 번째 베트남 작가의 책이다(남 레의 <보트>도 있지만 논외로 하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지 43년이 지났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생겨난 아시아 분단국가 중에 하나가 베트남이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와의 8년 전쟁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민족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프랑스에 이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10,000일의 전쟁이라고 했던가. 미국의 우방국으로 참전한 우리나라 병사들도 15,000명에 달하는 전상자를 기록했다. 소설을 쓴 바오닌은 베트남 정규군 소속으로 프랑스와의 해방전쟁 와중에 태어나 무신년 구정공세 다음해인 1969년 미국과의 전쟁에 참전해서 6년 동안에 걸친 격전을 치렀다. 전쟁의 마지막 날 탄손누트 공항을 사수하던 베트남 공수부대와의 사투에서 그의 소대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했던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미 전쟁을 치른 바오닌 작가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는 내가 예상했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68년 미국의 지도자들은 베트남 인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전비와 병력을 동원해서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 보려는 서방 지도자들의 노력은 민족해방과 자주통일을 원하던 베트남 인민들의 열망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선전보다 꽃다운 청춘들이 무수히 스러져간 전장의 비애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소설에서 저자는 다루고 있었다.
명백히 저자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주인공 끼엔은 전쟁이 끝난 뒤, 수개월 동안 통일열차를 타고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베트남을 누빈다. 끼엔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통일 조국의 기쁨을 누려야할 전우들이 기꺼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간 순간들을 무심하게 진혼한다. 살아남은 자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죽은 이들처럼 영면을 누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어낸다. 전후 작가로 변신해서 수많은 글들을 쓴 끼엔의 이야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끼엔의 추체험들은 시간을 엇갈리며 중첩되면서 17세 소년병이 직접 경험한 전쟁에 대한 비극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지금, 그 모든 것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야만적인 바람이 이 세상에 불어 닥쳤나? 끼엔은 책상에 앉았다. 아침이 오래전에 지나갔다. 점심. 오후. 날이 저물었다. 지난날의 어두운 혼돈 시대에 죽어간 영웅들, 친한 동료들에 대해 써 놓은 원고 더미 앞에서 우리 동네의 작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괴로움. 무거운 마음. 그럼에도 언제나 눈물과 슬픔은 말 없는 위로의 원천이 되었다. 항상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280쪽)
저자 바오닌은 단선적인 민족해방 이데올로기만으로 베트남전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오닌은 끼엔에게 연인 프엉이라는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한다. 문제는 끼엔과 프엉이 전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막연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을 향한 열정과 반복되는 행운의 여신이 부여한 애절한 시그널로 살아남을 수는 있었어도,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체험한 끼엔과 프엉의 삶은 전쟁 이전의 순수했던 시절로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바오닌이 그려낸 자전적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끼엔의 동료들이 왜 그를 슬픔의 신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고 방심할 수 없는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오닌의 존재는 기념할 만한 일일 것이다. 작가 바오닌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들을 갈고 닦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바오닌이 구사하는 한 문장이 한 문장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반도 종전 선언을 앞둔 시기에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