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자기 전에 몇 페이지 읽어 봐야지 하는 계산으로 책을 들었다가 낭패를 봤다. 새벽 2시도 훨씬 넘어서야 결국 책을 다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보니 1년 전에 비프케 로렌츠/샤를로테 루카스의 <당신의 완벽한 1년>으로 이 작가와 만났더랬지 아마. 그 때도 책을 재밌게 읽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시간여행을 빙자한 예전에 자행했던 어리석은 과거 특히나 반드시 지우고 싶은 일들을 지우는 일대 사건을 소재로 삼은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기똥차게 재밌었다. 결국 우리 인간이란, 후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방증이려나.

 

올해 29세 찰리(샤를로타) 마이바흐 양은 말 그대로 자유인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지난 수년간 원나이트 스탠드와 프리섹스를 즐기고(남자들이 수없이 바뀐다), 바에서 알바를 뛰지만 술을 서빙하기 보다 마시길 더 좋아한다. 그리고 핑크의 <Don't let me get me> 혹은 그 유명한 레이디오헤드의 <크립> 그리고 닥터 알반의 <싱 할렐루야> 같이 자극적이고 화끈한 음악들을 즐긴다. 그녀가 자주 입는 “헤픈 여자” 티셔츠는 또 어떻고.

 

뭐 누구나에게 사연은 있는 법, 우리의 주인공 찰 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드링크스&모어의 주인장 팀 크라머 그리고 노숙자 출신 게오르크 아저씨가 즐기는 수다와 농담따먹기는 지친 찰리 삶의 마약 같은 강력한 활력소로 작용한다. 동창회를 알리는 편지와 그놈의 첫사랑이자 옛사랑 모리츠 리히텐베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14년 전의 첫사랑과 뭔가 썸씽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이 야비한 놈은 철저하게 찰리를 이용해 먹는다. 비싼 비용을 들여 사입은 섹시한 캣슈트를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참석했던 동창회에서 엉망으로 취해 개망신을 당하고 가까스로 팀의 도움을 받아 집에 복귀한다.

 

자자 이제 무언가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 순간이다. 찰리는 팀의 군용점퍼에 들어 있는 라이프 매니지먼트, 그러니까 헤드헌팅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 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뭐, 찰리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말이다. 그런데 왜 난 자꾸만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좌충우돌하는 캐릭터들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아직 읽지도 보지도 못한 <시간여행자의 아내>라는 제목도.

 

어찌어찌해서 찰리는 과거의 수치스러운 다시 말해서 당장에라도 지우고 싶은 과거들을 모두 삭제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편할 수가! 문제는 과거의 어떤 요소들이 빠지게 되면 현재의 모든 것도 바뀌게 된다는 나비효과 클리셰이 설정이다. 좀 진부하긴 하다. 그렇게 해서 찰리는 잘 나가는 컨설턴트로 수백만 유로를 주무르는 모리츠와 새로운 생에서 결혼에 골인해 피렌체로 꿈만 같았던 신혼여행을 떠나고, 아멕스 플래티넘 카드로 명품 쇼핑을 해대고,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현실을 맞이한다. 지난 생에서 없던 자동차 면허는 덤이다.

 

 

그렇다면 과연 찰리는 이번의 새로운 생에서 행복했을까? 바로 이 지점에 비프케 로렌츠는 화끈한 질문거리들을 쏟아 내기 시작한다. 그 좋아하는 맥주도 실컷 마시지 못하고, 인스턴트 생선가스가 육신의 구원이었던 호시절은 모두 지나가 버렸다. 모리츠란 남편놈은 결국 연적이자 찰리의 직장상사 이자벨과 차고에서 사고를 치다가 망신살이 뻗치지 않는가 말이다.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같은 이지리스닝 음악은 들으면서 살 수 없다며, 금고에서 빼낸 카드로 500유로 어치나 되는 CD를 사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래 맞아, 이런 게 찰리의 진정한 행복은 아니었어. 그래서 우리의 찰리 선수는 좀 아쉽긴 하겠지만 지루하고 답답한 생에서 벗어나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서게 된다는 게 비프케 로렌츠 소설의 핵심이란다. 그 와중에 덤으로 등장하는 지난 십년간 팝송을 멀리해서 몰랐던 팝송들에 대한 정보는 서비스다. 이 리뷰를 마치고 나면, 글(가사)로만 만난 노래들을 하나씩 찾아 들어볼 계획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학적 성취 보다 소설을 읽는 재미라는 점 하나만큼은 최근에 만난 로버트 크레이스의 미스터리 소설만큼 재밌었노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싶다. 이상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