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 갯마을/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저녁에 아내가 전복죽을 끓였어요. "웬 전복죽?" "요즘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흐흐흐~"

 

그런데 이런 표면적 호응(好應, 좋은 반응)과 달리 머릿속에는 조미미의 애절한 노래가  떠올랐어요. 서산 갯마을(위 인용문). 뿐 만 아니라, 춘향전에 나오는 시도 떠올랐어요.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금술잔의 맛좋은 술 만백성의 핏물이요

玉盤佳肴萬姓高 옥반가효만성고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 만백성의 기름이로다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낙시민루락   촛불의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노랫소리 드높을 제 백성들의 원성 또한 높도다

 

맛있게 먹을 전복죽을 앞에 두고 이 무슨 궁상맞은 생각인가, 싶더군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건 우리 세대가 살아온 체험으로 얻은 어쩔 수 없는 생각 아닐까, 싶기도 하더군요. 우리 세대는 흔히 베이비 붐 세대로 불리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새마을 세대라고 불려요. 7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거든요.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맛있는 것' 보다는 '배부른 것'을 우선시 했어요. 당연히 전복죽 같은 것은 먹어본 적도 없고,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요. 그런 것은 지위 높고 돈 많은 이들이나 먹는 것으로 치부했지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음식을 먹는 이들에 대해 부러움과 더불어 시샘도 갖게 됐구요. 전복죽을 대하며 '서산 갯마을'이나 춘향전의 시를 떠올린 건 잠재돼있던 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일 거예요.

 

이제 우리 세대는 일상에서 전복죽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게 됐어요(먹겠다는 결심만 하면). 그러나 여전히 전복죽은 특별한 음식이에요. 어렵지 않게 먹을 순 있지만 쉽게 먹진 못하지요. 돈 문제도 약간 있지만 그 보다는 마음의 문제가 더 커요. '맛 있고 영양가 있는 것' 보다는 '양 많고 배부른 것'을 선호하는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거든요. 더불어 먹는 것에 사치 부리는 것을 터부시하는 의식도 한 몫 하고요. 이 역시 궁상맞은 의식이겠죠?

 

전복죽을 먹으며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더니, 아내가 한 마디 했어요. "글쎄, 그게 꼭 궁상 맞기만 한 것일까?"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어요. "배불리 맛있게 먹어~" “

 

사진은 아내가 산 전복 포장지에서 찍었어요. '전복(全鰒)'이라고 읽어요.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들 입)(의 약자, 구슬 옥)의 합자예요. 옥을 깊숙이[] 잘 보관한다, 란 의미예요. 온전할 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完全(완전), 全體(전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물고기 어)(의 약자, 회복할 복)의 합자예요. 전복이란 의미예요. 어패류이기에 로 뜻을 삼았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전복 복.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鰒魚(복어, 全鰒과 같은 뜻)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전복은 포() 혹은 석결명(石決明) 또는 구공라(九孔螺)라고도 불려요. 포는 전복을 말려 먹는데서 비롯된 명칭이고, 석결명은 전복이 암초에 기생하는데서 비롯된 명칭이며, 구공라는 전복의 껍데기 표면 구멍에서 비롯된 명칭이에요. 요즘은 대부분 양식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 국립수산과학원 수산종묘배양장에서 종묘 생산을 시작했고 1974년부터 생산한 종묘를 양식어민에게 분양하고 있어요(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조미미의 '서산 갯마을'1972년에 발표됐어요. 양식 전복이 나오기 전의 전복 채취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예요. 그래서 이 노래가 더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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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데 있다. 머무를 곳을 안 이후에 안정됨이 있고, 안정됨이 있은 이후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이 있은 이후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이후에 생각할 수 있으며, 생각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

 

『대학(大學)』 첫 머리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대학(여기서는 책명이 아닌 큰 학문이란 의미)이 추구하는 바를 명시하고 있어요. 흔히 이 명시 내용을 삼강령(三綱領)이라고 하죠.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관심있게 볼 부분은 삼강령도 삼강령이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삼강령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죠. 중에서도 더욱 관심있게 볼 부분은 '머무를 곳을 안다'란 대목이에요. 구현 방법론 중에서도 가장 밑바탕이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머무를 곳을 안다'란 대목을 『대학』 에 나오는 용어로 표현하면 '치지(致知)'라고 할 수 있어요. 『대학』에서는 삼강령의 실천 덕목으로 팔조목(八條目,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을 들고 있는데 치지는 그 두 번째 덕목이에요.

 

그런데 치지를 하기 위해서는 '격물(格物)'이 선행돼야 해요. 격물은 흔히 사물을 탐구한다란 의미로 풀이하는데, 이는 약간 모호한 풀이예요. 자칫 자연과학적 탐구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보다는 '처(處事, 일을 처리함)와 접(接物, 타인을 대함)을 탐구한다'로 풀이하는 것이 좋아요. 인문과학적 탐구의 의미로 풀이하는 거죠. 그래야 『대학』의 내용과도 상통해요. 『대학』은 천하 경영을 위한 마음 자세를 논한 책이거든요.

 

정리해 볼까요? 삼강령을 구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격물치지예요. 격물치지란 부단한 처사 접물을 통해 머무를 곳을 아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많은 일과 사람을 접하면서 이들을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는 가치관을 획득한다는 뜻이에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치관의 자득(自得)'이라고 할 수 있어요(이상 격물치지에 관한 내용은 이광호 씨의 주장을 참고했어요).

 

사람이 혼자 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으며 생사고락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면 가치관의 자득이 필요없을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고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문제를 안고 있으며 생사고락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치관의 자득을 고민하게 되지요. 격물치지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야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천하를 경영할 사람이야 더더욱 말할 필요 없겠죠(사실 『대학』에서 언급하는 격물치지는 제왕(帝王)을 염두에 둔 것이에요).

 

사진은 '다여인생 인생여차(茶如人生 人生如茶)'라고 읽어요(茶은 앞머리에 올 때는 '다'로, 뒤에 올 때는 '차'로 읽어요). '차는 인생과 같고, 인생은 차와 같다'란 뜻이에요. 동어반복이지만 미묘한 의미 차이가 있어요. 앞 구절은 차를, 뒷 구절은 인생을 강조했어요. 차 제조 과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채엽(採葉, 따기) - 살청(殺靑, 덖기) - 유념(揉捻, 비비기) - 건조(乾燥, 말리기)'의 과정을 거치죠. 야생의 차가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삶을 마감한다면 이런 과정이 필요없겠죠. 그러나 한 잔의 기호 음료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죠. 마치 사람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격물치지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 처럼 말이죠. 이런 점에서 차는 인생과 같고, 인생은 차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사진은 아내 친구 분이 준 포장지에서 찍은 거예요. 비록 포장지 문구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요.

 

茶와 如 두자가 약간 낯설죠? 자세히 살펴 볼까요?

 

茶는 艹(풀 초)와 余(나 여)의 합자예요(지금은 茶를 쓸 때 余에서 一을 빼고 쓰죠). 쌉싸름한 풀 혹은 그 풀로 우려낸 음료란 뜻이에요. 艹로 뜻을 표현했어요. 余는 음(여→다)을 담당해요. 차 다(차). 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茶道(다도), 綠茶(녹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如는 본래 '따른다'는 의미였어요. 과거에 여성은 순종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女(여자 녀)를 사용했고, 여성이 따르는 것은 부모와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口(입 구)를 사용했어요. 같다라는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부모나 남편이 말하는 대로 똑같이 행동하고 따른다는 의미로요. 같은 여. 如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如一(여일), 如此(여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차 맛을 차별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어떤 차 맛이든 그건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만의 격물치지 과정을 겪어 나온 맛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인생도 성공과 실패로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만의 격물치지 과정을 겪어 이룩한 삶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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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 지수는 재난 스트레스 지수와 동일하다!

 

어제 한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예요. 주부들이 명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수준이 재난을 당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 지수와 동일하다고 하니 한결 더 실감나게 느껴지더군요. 요즘 명절 문화에 많은 변화가 생겨 차례(茶禮)를 지내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집에서 차례를 지내며 명절을 보내고 있으니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 지수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 같아요.

 

명절 스트레스 중의 하나가 차례 음식 준비와 설거지죠. 그런데 원래 차례 음식은 지금처럼 푸짐하게 차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요. 성균관에서 전례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정택씨는 이렇게 말해요: "차례는 기일에 올리는 기제사와는 다르다. 추석이나 설날에 차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를 뜻한다. 조상에게 해가 바뀌고,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음을 알린다는 취지로 기제사의 축소판으로 봐야 한다. 새로운 음식, 즉 곡식이나 과일이 나오면 그걸 조금 올려 조상께 인사한다는 의미다. 그것들을 기제사와 오인해서 너무 거추장스럽게 하다 보니까 일이 너무 많아졌고, 이를 전담하게 된 주부들이 버거워졌다." 전통 예절에 정통한 분이 하는 말이니 믿고 따를만한 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분 말대로라면 차례상을 요란하게 차리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일이에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예법에도 맞지 않는것이 현 대다수 집안의 차례상 차리기니, 이 말을 들으면 주부들 스트레스 지수가 더 올라갈 것 같아요.

 

앞으로는 명절날 전통 예절에 맞게 말 그대로 간단한 다과(茶果)만 올리는 차례를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도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차례용 차로는 가급적 우리나라 전통차를 사용하는게 좋겠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요즘 많이 음용하는 보이차도 괜찮을 것 같아요. 산 사람도 그렇지만 고인(故人)들도 색다른 차를 맛보고 싶어하실테니까요.

 

사진은 보이차의 포장지에 있는 문안이에요. 읽고 풀이해 볼까요?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

 

보이차 증지성단 서번시지 최능화물 보이차 미고성각 해유이우양독 고삽 축담하기 이장통설(普洱茶 蒸之成團 西番市之 最能化物 普洱茶 味苦性刻 解油腻牛羊毒 苦澀 逐痰下氣 利腸通泄) 야(野)

 

 『본초강목습유』(청 대 조학민이 편찬한 의서. 명나라 이시진이 편찬한 본초강목의 내용을 보완한 책)에 이렇게 나와있다. 보이차는 쪄서 둥그렇게 만든다. 서번 지역에서 판매하는데 다른 물건과 교역하는데 가장 유리한 물건이다. 보이차는 맛이 쓰고 성질이 강하여 지방이나 소고기 양고기의 독성분을 잘 풀어준다. 쓰고 떫은 기운은 가래를 삭히고 기운을 가라앉히거나 장을 편하게 하여 배변을 원활하게 한다. * 야(野)는 신선함을 강조하기 위해 쓴 글자인 듯. 『본초강목습유』 내용과는 무관.

  

보이차의 효능을 적어 놓았는데, 주된 효능은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에요. 특히 육식으로 인한 적체(積滯)를 해소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적고 있어요. 『본초강목습유』원문을 찾아보니, 이 광고 문안에는 빠진 두 가지 의미있는 내용이 더 있더군요. '허인금용(虛人禁用)'과 '성주제일(醒酒第一)'이에요. '기운없는 이는 마시지 말 것', '술 깨는데 최고'라는 의미예요. 둘 다 술과 고기를 잘 먹은(는) 사람한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에요. 평소 술과 고기를 잘 먹지(먹을 수) 못하는(없는) 이들에게는 적합치 않은 차라고 할 수 있어요. 보이차를 만병통치약처럼 광고하는 문구를 이따금 보는데 - 실제 그런 비슷한 문구가 『본초강목습유』에 있기는 해요. 보이차고능치백병(普洱茶膏能治百病, 보이차로 만든 고약은 온갖 병을 치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엄밀하게 말해 차를 말한 것이 아니라 차로 만든 약을 의미해요 - 그건 좀 과장된 문구예요.

 

차례라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후손들의 단합을 도모하는 자리이니 어느 누구에게 부담이 전가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차례의 본질에 어긋난 일이에요. 앞으로는 명절에 말 그대로 차례를 드리고 식구들도 술 대신 차를 나누는 고상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괜찮지 않나요?

 

사진에 등장한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普는 並(나란할 병)과 日(날 일)의 합자예요. 햇빛이 사라져 일체의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상태가 되었다란 의미예요. 넓을 보. 普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普遍(보편), 普通(보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洱는 氵(물 수)와 耳(귀 이)의 합자예요. 하남성 노씨현 웅이산에서 발원하여 육수로 합류하는 물이름이에요. 물이름 이. 고유명사로 이 외에 달리 들만한 예가 없네요.

 

蒸은 艹(풀 초)와 烝(김오를 증)의 합자예요. 껍질을 벗긴 삼대란 의미예요. 艹로 뜻을 표현했어요. 烝은 음을 담당해요. 찌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삼대 증. 찔 증. 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蒸溜(증류), 蒸發(증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腻는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貳(거듭할 이)의 합자예요. 살 위에 거듭된 물체, 즉 비계란 의미예요. 기름 리. 腻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腻理(이리, 살결이 곱고 반들반들함), 腻脂(이지, 비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澀은 氵(물 수)와 歰(막힐 삽)의 합자예요. 물이 막혀 잘 내려가지 않는다란 의미예요. 본 의미에서 연역되어 떫다란 뜻으로도 사용해요. 막힐 삽. 떫을 삽. 澀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澀語(삽어, 떠듬거리는 말), 澀苦(삽고, 떫고 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澁으로도 표기해요.

 

痰은 疒(병들어누울 녁)과 炎(불꽃 염)의 합자예요. 가래란 뜻이에요.  疒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炎은 음(염→담)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위로 솟구치는 불꽃처럼 위로 끓어오르는 것이 가래란 의미로요. 가래 담. 痰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喀痰(객담, 가래를 뱉음. 또는 그 가래)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泄은  氵(물 수)와 世(인간 세)의 합자예요. 넘치다란 의미예요.  氵(물 수)로 뜻을 표현하고, 世로 음(세→설)을 나타냈어요. 본뜻에서 연역하여 새다란 의미로도 사용해요. 넘칠 설. 샐 설. 泄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泄瀉(설사), 漏泄(누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보이(普洱)를 읽는 한자어의 현재 음가는 푸얼에 가깝지만, 이는 보이차를 처음부터 만들어온 운남성의 소수민족인 다이()족과 이(), 부랑(布朗), 지눠(基諾)족 등이 소리 내는 푸레또는 부레라는 말의 음차예요.라는 어소(語素)는 떡 또는 떡차를 가리키고, ‘는 차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즉 보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떡차곧 오늘날의 원차(圓茶), 병차(餠茶)를 의미하는 말이지요. 따라서 보이차라는 이름의 유래를 운남성 보이현(普洱縣)이라는 지역에서 찾는 오늘날의 상식과는 반대로, 보이라는 지역 이름이 푸레라는 일반명사에 뿌리를 두며 이러한 차가 많이 생산되고 거래되면서, 지명이 '푸레'에서 '푸얼'로 붙여지게 되었어요(이상 http://www.gutea.co.kr/ab-1040 인용). 사진은 아내의 친구 분이 선물한 보이차 포장지에서 찍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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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에 등장하는 '초의에게 주는 글' 역시 가는 획에 힘이 없고 미풍에도 흩날릴 것 같다. 단박에 위작이다. 편지는 해서나 행서로 쓰지, 예서로 쓰는 법이 없다. 옛 서체라도 율동감이 있어야 하는데 획들이 너무 가늘고 뻣뻣하다. 이를  두고 유교수는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어지러운 듯하나 묘하게도 변함의 울림이 일어나 오히려 멋스럽다"고 썼다. 이런 억지 주장은 도처에 있다." (강우방, 「주간 동아」  1151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최근 『추사 김정희』를 펴냈어요. 그런데 이 속에 소개된 작품의 절반 이상이 위작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하는 글이 나왔어요. 인용문은 이 글 일부인데, 글쓴이는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 연구원장이에요. 유교수와 강원장 모두 고미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분들로 평가받아요. 그런데 추사의 작품을 놓고 진위(眞僞)와 고하(高下)를 달리하니, 문외한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할지 난감해요. 예술적 안목이란 것이 다분히 주관성이 강하다는 것을 십분 이해한다해도 말이죠.

 

사진은 북송의 서예가이자 서화감식가인 미불(米芾, 1051-1107)의 작품이에요. 초서를 품평한 글로 흔히 「논초서첩(論草書帖)」이라 불려요. 읽고 해석해 볼까요?

 

 

草書若不入晉人格 輒徒成下品 張顛俗子 變亂古法 驚諸凡夫 自有識者 懷素少加平淡 稍到天成 而時代壓之 不能高古 高閑而下 但可懸之酒肆 光尤可憎惡也

 

초서약불입진인격 첩도성하품 장전속자 변란고법 결제범부 자유식자 회소소가평담 초도천성 이시대압지 불능고고 고한이하 단가현지주사 변광우가증오야

 

초서가 진인(晉人)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하면 하품이 되고 만다. 장전은 속물이다. 옛 법도를 파괴하여 평범한 감식가들을 놀래켰을 뿐이다. 회소의 작품은 어느정도 평담함이 더해져 천성(天成)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많았지만 시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끝내 고아한 옛 법도에 이르지 못했다. 고한이하의 작품들은 술집 간판에나 어울릴만한 것들이며, 중에서도 변광의 작품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미불은 당나라 시대 광초(狂草)를 쓴 작가들의 작품을 혹평하고 있어요. 초성(草聖)으로까지 불린 장욱을 속물이라고 평하는가 하면 고한 등의 작품은 술집 간판 정도의 품격밖에 안되며 변광의 작품은 혐오스럽다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한 회소의 작품조차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했어요. 미불이 저명한 서화감식가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의 품평에 섣불리 딴지를 걸기 어려워요.

 

그런데 미불 못지않은 서예가이자 서화감식가였던 동시대 인물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장욱과 회소에 대해 이렇게 평했어요: "이 두 사람은 한 시대 초서의 으뜸이다(此二人者 一代草書之冠冕也)" 장욱과 회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면 고한이하의 인물이나 변광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거라 짐작할 수 있어요. 앞서 유교수와 강원장의 극단적 평가 때문에 난감했던 것처럼 미불과 황정견의 극단적 평가에서도 어느 견해를 따라야 할 지 난감해요.

 

예술적 안목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이 결합되어 성숙하죠. 그러나 그 성숙된 정도가 어느 경지인지는 고수들만 알뿐 문외한은 가늠하기 어려워요. 문외한은 그저 경외 반 질투 반의 심정으로 그들간의 논쟁을 지켜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게 '싸움'하고 '불구경'이라고 했던가요? 고수들의 안목 싸움도 예외는 아니겠죠? 미불과 황정견의 품평 논쟁은 두 분 다 고인(故人)이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지만 유교수와 강원장의 엇갈린 안목 싸움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해요. 필시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될 거예요.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顛은 頁(머리 혈)과 真(참 진, 眞과 동일)의 합자예요. 머리란 뜻이에요. 頁로 뜻을 나타냈어요. 真은 음(진→전)을 담당해요. 미치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사진의 내용에서 顛은 미치다란 뜻으로 사용됐어요. 장욱과 회소는 글씨를 쓸 때 술에 취하여 미친듯이 썼다 하여 장전광소(張顛狂素, 미치광이 장욱과 회소)란 별칭으로 불렸어요. 머리 전. 미칠 전. 顚으로 표기하기도 해요. 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顛倒(전도), 顛末(전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變은 강제로 바꾼다란 뜻이에요. 攵(칠 복)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란→변)을 담당해요. 고칠 변. 변할 변. 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變法(변법), 變化(변화) 등을 들 수 있겠네요.

 

亂은 양 손으로 얽힌 실타래를 푸는 모습을 그린 거예요. 얼힌 실타래에 중점을 두어 '어지럽다'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푸는 모습에 중점을 두어 '다스리다'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해요. 어지러울 란. 다스릴 란. 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混亂(혼란), 亂民(난민, 국법을 어지럽히는 백성 혹은 백성을 다스리다란 뜻)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驚은 馬(말 마)와 敬(공경 경)의 합자예요. 말이 의심스런 상황에 놀라다란 뜻이에요. 놀랄 경. 馬로 뜻을 표현했고 敬으로 음을 표현했어요. 驚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驚氣(경기), 驚愕(경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稍는 禾(벼 화)와 肖(닮을 초)의 합자예요. 볏줄기의 끝 부분이란 뜻이에요. 禾로 뜻을 나타냈어요. 肖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볏줄기 본체와 닮은 것이 볏줄기 끝이란 의미로요. 끝 초. '점점'이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본체에서 점점 멀어진 것이 끝 부분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이죠. 점점 초. 稍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稍稍(초초, 점점. 차차로), 稍事(초사, 작은 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壓은 土(흙 토)와 厭(싫어할 염)의 합자예요. 누르다란 뜻이에요. 土로 뜻을 표현했어요. 厭은 음(염→압)을 담당해요. 누를 압. 壓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壓迫(압박), 壓力(압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懸은 心(마음 심)과 縣(고을 현)의 합자예요. 윗 사람에게 매여있다란 뜻이에요. 心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縣은 음을 담당해요. 매달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매달 현. 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懸河之辯(현하지변, 거침없이 잘하는 말), 懸板(현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肆는 镸(長의 고자, 길 장)과 聿(逮의 약자, 미칠 체)의 합자예요. 늘어놓다란 뜻이에요. 镸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聿는 음(체→사)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한 쪽에서 다른 쪽에 이르로록 배열한 것이 늘어놓은 것이란 의미로요. 늘어놓을 사. 가게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가게 사. 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放肆(방사, 제멋대로 행동하며 거리끼고 어려워하는 데가 없음), 藥肆(약사, 약가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광초는 서예술이 정점에 이른 글씨라 할 수 있어요. 글씨쓰는 이의 취향이 최대한 반영되어 글씨인지 그림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하면, 글자 본래의 목적인 정보 전달이라는 객관적 실용성은 최소로 떨어뜨리고 작가의 취향 전달이라는 주관적 예술성은 최대로 끌어 올린 것이 광초라고 할 수 있어요. 미불이 장욱 등의 광초를 싫어한 것은 이런 정점에 이른 편향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봐요. 반면, 진대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던 건 객관적 실용성과 주관적 예술성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보았기 때문은 아닐지? 미불이 살던 시대가 송나라 때이고 송나라는 사대부의 나라였으며 사대부는 중용(中庸)의 가치를 중시했기에 그런 평가를 했다고 보는거예요(물론 같은 사대부라도 황정견은 미불과 견해를 달리했지만요). 아래 장욱의 광초 한 점을 소개해요(미불과 장욱의 작품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고, 작품 원본은 각각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중국의 요녕성박물관에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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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시겠어요?"

 

"살아보세요!"

 

작년 여름 지인 몇과 충주호에 갔어요. 근처 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시키며 지인 한 사람이 주인에게 수인사 겸 덕담을 건넸는데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어요. 주인은 답변 끝에 한마디 더 덧붙였어요. "물만 보면 지겨워요."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린 시를 '산수시'라고 해요. 산수 자체를 그린 시도 있고, 산수를 그리면서 자신의 흥취를 덧붙인 시도 있어요. 그런데, 다른 시도 마찬가지지만, 성공적인 산수시가 되려면 독자에게 감동을 줘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제 아무리 훌륭한 표현을 동원하여 산수시를 지었다 해도 성공한 작품이 될 수 없어요. 그건 흡사 경치좋은 곳에 살길래 행복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저 음식점 주인의 경우와 같아요.

 

겉모습과 실상이 다른 음식점 주인과 그와 흡사한 실패한 산수시 작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요. 음식점 주인은 경치좋은 곳에서 그저 돈 벌 생각만 하기에 좋은 경치를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는 것이고, 실패한 산수시의 작자는 산수의 미감을 손쉽게 상투적인 표현으로 그려냈기에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지 못하는 거예요. 진정성이 있다면 좋은 경치를 탓하거나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는데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사진은 안축(安軸 1287-1348)의 경포범주(鏡浦泛舟, 경포 호수에 배를 띄우고)란 산수시예요. 경포대를 노래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외면상으로 보면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시예요. 우선 읽어 볼까요?

 

 

雨晴秋氣滿江城  우청추기만강성     비 개인 강 언덕 가을 기운 가득한데

來泛扁舟放野情  래범편주방야정     조각배 띄우고 서늘한 마음 푸노라

地入壺中塵不到  지입호중진부도     병 속에 든 듯 티끌 하나 이르지 않아

人遊鏡裏畵難成  인유경리화난성     거울 속에 노는듯하니 이 어찌 그림으로 그리나

煙波白鳥時時過  연파백조시시과     물안개 피는데 갈매기는 때때로 오가고

沙路靑驢緩緩行  사로청려완완행     백사장엔 푸른 나귀 느릿느릿 걸어가네

爲報長年休疾棹  위보장년휴질도     사공아, 노 빨리 젓지 마소

待看孤月夜深明  대간고월야심명     한밤중 외로운 달 밝은 것을 보려니

 

 

그런데 이 시를 되풀이 읽어보면, 이상하게,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아요. 왜 그런지 곰곰히 생각해 봤어요. 가장 큰 원인은 산수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데 있어요. 진정성이 없기에 독자인 제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이런 독단적인 언사만으로 이 시를 평가한다면 설득력이 없겠죠? 하여 나름의 근거를 제시해 보려 해요.

 

산수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보니 이 시가 보여주는 색채의 미감은 '백색'으로 표현됐어요. '비 개임' '가을 기운' '티끌 이르지 않음' '거울 속' '물안개' '갈매기' '백사장' '달 밝음'이 보여주는 색채는 모두 백색이죠. 이 시에는 물론 청색(靑驢)과 흑색(夜深)이 등장하지만 주조색인 백색을 압도하진 못해요. 시의 주조색은 백색이라해도 무방하죠. 그런데 백색은 무엇을 상징하던가요? 깨끗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죽음' '공포' '고독'을 주로 상징하지 않던가요? 시인이 산수에 대한 진정성이 있었다면 결코 백색으로 시 전체의 색감을 도배하진 않았을 거예요. 백색으로 도배된 산수시에서 감흥을 느끼기란 쉽지 않죠.

 

그런데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어요. "산수시의 색조가 백색이면 무조건 감흥이 없는거냐?" 물론 그렇진 않을 거예요. 진정성이 없는 무미건조한 백색이기에 감흥이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시인은 어쩌다 무미건조한 백색으로 시를 도배한 걸까요? 그건 이 시의 표현 내용과 관련이 있어요. 이 시의 제목을 가리고 내용을 읽어보면 이 시가 꼭 경포호를 그린 거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다시 말하면 그냥 범범한 표현으로 경포호를 그렸다는 거예요. 호수의 풍경을 그릴 때 물안개와 갈매기를 등장시키거나 호수를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표현법이죠. 호수 밖 풍경을 그릴 때 백사장을 지나는 나귀를 그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구요. 경포호에 대한 진솔한 감정이 없기에 상투적인 표현을 빌어 경포호를 그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백색이 주조를 이루는 무미건조한 산수시를 지은 거예요.

 

그런데 또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어요. "한시에서 상투적인 표현은 흔한 것 아니냐? 상투적인 표현을 써서 무미건조한 시가 됐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꼭 그렇진 않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문제는 상투적 표현을 너무 손쉽게 사용한다는데 있어요. 고심 끝에 어쩔 수 없어 상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 하고 손쉽게 상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죠. 전자는 독자에게 감흥을 줄 수 있지만, 후자는 식상함만 안겨주죠. 안축의 산수시는 후자라고 볼 수 있어요. 하여 감흥을 주지 못하는 거예요.

 

문학 작품의 감상은 아무리 객관적 기준을 제시한다 해도 상대를 설득하는데는 한계가 있어요. 안축의 산수시를 나름대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비판해 봤지만 사실 그 근거 자체도 어찌보면 주관적인 근거라 설득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안축의 산수시를 좋게 보는 이들도 분명 많을 거예요. 그래서 널리 회자됐고 저렇게 시비(詩碑)까지 세운 거겠지요(사진은 인터넷에서 얻었어요. 경포호 주변 한시 공원에 이 시비가 있다고 해요). 혹 안축의 작품에 호감을 가진 분들은 저의 마뜩잖은 평가에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이렇게 이 시를 볼 수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어떨까 싶어요.

 

작품에 나온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晴은 본래 夝으로 표기했어요. 夝은 夕(저녁 석)과 生(星의 약자, 별 성)의 합자예요. 비가 개어 밤 하늘에 별이 보인다는 의미예요. 갤 청. 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晴明(청명), 晴天霹靂(청천벽력, 급격한 변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泛은 氵(물 수)와 乏(살가림 핍)의 합자예요. 뜨다라는 의미예요.  氵로 의미를 나타냈어요. 乏은 음(핍→범)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에 뜰 때는 화살에 맞는 것을 가리는 나무판(乏)같은 것에 의지해 뜬다는 의미로요. 뜰 범. 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泛舟(범주)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넓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해요. 泛稱(범칭, 넓은 범위로 쓰는 명칭).

 

扁은 戶(지게문 호, 한짝 문)와 冊(책 책)의 합자예요. 문 위나 옆에 붙인 현판(冊)이란 의미예요. 현판 편. 본뜻에서 연역하여 작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해요. 작을 편. 扁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扁額(편액), 扁舟(편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塵은 본래 鹿(사슴 록)과 土(흙 토)의 합자예요. 사슴들이 뛰어가면서 일으킨 흙먼지라는 의미예요. 티끌 진. 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塵埃(진애), 粉塵(분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驢는 馬(말 마)와 盧(밥그릇 노)의 합자예요. 나귀라는 의미예요. 馬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盧는 음(노→려)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색깔이 거무스름하며 조악한 밥그릇(盧)처럼 말[馬] 비슷하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나귀란 의미로요. 나귀 려. 驢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驢輦(여련, 나귀가 끄는 수레), 驢鳴犬吠(여명견폐, 나귀가 울고 개가 짖다. 졸렬한 문장이란 의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緩은 糸(실 사)와 爰(이에 원)의 합자예요. 느슨하다, 느리다란 의미예요. 糸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爰은 음(원→완)을 담당해요. 느슨할(느릴) 완. 緩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緩急(완급), 弛緩(이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疾은 疒(병 력)과 矢(화살 시)의 합자예요. 화살처럼 빠르게 퍼지는 질환이란 의미예요. 병 질. 빠를 질. 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疾病(질병), 疾走(질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안축하면 떠오르는 건 경기체가인 '죽계별곡'과 '관동별곡'이에요. 경기체가는 무미건조한 시가예요. 여러 대상을 나열하고 끝에 가서 '이 모습 어떠합니까?'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이 경기체가거든요. 국문학사에서는 여말 신흥 사대부의 정서 - 심(心)보다 물(物)을 중시하는 - 를 반영하는 시가라고 평가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는 시가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승경의 나열에 불과한 짧은 산문에 가까워요. 이런 경기체가를 지은 안축이다보니 산수시도 위와 같은 무미건조한 작품을 지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물론 이 결론은 무리가 있어요. 그의 작품 전모를 읽어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고 침소봉대하여 내린 결론이니까요. 후일 그의 작품 전모를 읽을 기회가 생겨 이런 생각이 맞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가늠해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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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9-0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시는 좋은 반례로서 인용되었네요.
그냥 읽고 넘어가기 아까운 글들을 매번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맘 먹고 한편 한편 공부해볼까 결심을 부르는 내용들이어요.

찔레꽃 2018-09-08 20: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

무심이병욱 2018-09-1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을 다해 쓴 설명에 감복합니다. 한시도 감동을 주곤 하는데 찔레꽃 님이 분석했듯이 안축의 한시는 감동 주지 못하네요. 사실 한시의 도구인 한자가 뜻글자로서 ‘시어‘로서는 아주 좋지요. 한시에 쓰인 한자들이 시각적 이미지라든가 청각적 이미지를 일으키는 역할로는 그만한 게 없지요. 나아가서는 공감적 이미지까지 일으키는데 무심은 경탄을 금하기 어려웠던 기억입니다. 물론 교직에 있었을 때 국어 시간에, 이백이나 두보의 작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겪었던 일입니다.

알라딘 창작 블로그 시절, 찔레꽃 님과 무심의 글이 수시로 함께 게재되곤 했는데 -----추억이 되었나 봅니다.


찔레꽃 2018-09-16 19:38   좋아요 0 | URL
˝정성을 다해 쓴 설명에 감복합니다.˝ 무심 선생님의 말씀에 저 또한 감복합니다. 무심 선생님은 글 배면을 꿰뚫어 보는 맑고 밝은 눈을 가지신 듯 합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건강이 안좋으셔서 병원에 가셨던 듯 싶은데....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요즘 일교차가 커서 감기 걸리기 쉬운듯 합니다. 유의하셔요~

선생님의 글을 늘 읽고 있습니다만 섣불리 댓글 달기가 어려워 - 어설픈 댓글로 결례만 범할 것 같아 - 그저 보고만 나오고 있습니다. ^ ^

무심이병욱 2018-09-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려 덕에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떤 댓글도 저는 반갑습니다. 제 글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찔레꽃 님처럼 글에 정성을 다하는 분의 댓글이야 더 말 할 게 있습니까!

저는 요즈음 내년초에 발간 예정인 ‘작품집 2편‘ 준비로 소설 쓰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기분 전환 겸 밭에 가서 농사도 짓습니다.
찔레꽃 님의 변함없는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