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시겠어요?"

 

"살아보세요!"

 

작년 여름 지인 몇과 충주호에 갔어요. 근처 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시키며 지인 한 사람이 주인에게 수인사 겸 덕담을 건넸는데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어요. 주인은 답변 끝에 한마디 더 덧붙였어요. "물만 보면 지겨워요."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린 시를 '산수시'라고 해요. 산수 자체를 그린 시도 있고, 산수를 그리면서 자신의 흥취를 덧붙인 시도 있어요. 그런데, 다른 시도 마찬가지지만, 성공적인 산수시가 되려면 독자에게 감동을 줘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제 아무리 훌륭한 표현을 동원하여 산수시를 지었다 해도 성공한 작품이 될 수 없어요. 그건 흡사 경치좋은 곳에 살길래 행복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저 음식점 주인의 경우와 같아요.

 

겉모습과 실상이 다른 음식점 주인과 그와 흡사한 실패한 산수시 작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요. 음식점 주인은 경치좋은 곳에서 그저 돈 벌 생각만 하기에 좋은 경치를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는 것이고, 실패한 산수시의 작자는 산수의 미감을 손쉽게 상투적인 표현으로 그려냈기에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지 못하는 거예요. 진정성이 있다면 좋은 경치를 탓하거나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는데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사진은 안축(安軸 1287-1348)의 경포범주(鏡浦泛舟, 경포 호수에 배를 띄우고)란 산수시예요. 경포대를 노래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외면상으로 보면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시예요. 우선 읽어 볼까요?

 

 

雨晴秋氣滿江城  우청추기만강성     비 개인 강 언덕 가을 기운 가득한데

來泛扁舟放野情  래범편주방야정     조각배 띄우고 서늘한 마음 푸노라

地入壺中塵不到  지입호중진부도     병 속에 든 듯 티끌 하나 이르지 않아

人遊鏡裏畵難成  인유경리화난성     거울 속에 노는듯하니 이 어찌 그림으로 그리나

煙波白鳥時時過  연파백조시시과     물안개 피는데 갈매기는 때때로 오가고

沙路靑驢緩緩行  사로청려완완행     백사장엔 푸른 나귀 느릿느릿 걸어가네

爲報長年休疾棹  위보장년휴질도     사공아, 노 빨리 젓지 마소

待看孤月夜深明  대간고월야심명     한밤중 외로운 달 밝은 것을 보려니

 

 

그런데 이 시를 되풀이 읽어보면, 이상하게,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아요. 왜 그런지 곰곰히 생각해 봤어요. 가장 큰 원인은 산수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데 있어요. 진정성이 없기에 독자인 제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이런 독단적인 언사만으로 이 시를 평가한다면 설득력이 없겠죠? 하여 나름의 근거를 제시해 보려 해요.

 

산수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보니 이 시가 보여주는 색채의 미감은 '백색'으로 표현됐어요. '비 개임' '가을 기운' '티끌 이르지 않음' '거울 속' '물안개' '갈매기' '백사장' '달 밝음'이 보여주는 색채는 모두 백색이죠. 이 시에는 물론 청색(靑驢)과 흑색(夜深)이 등장하지만 주조색인 백색을 압도하진 못해요. 시의 주조색은 백색이라해도 무방하죠. 그런데 백색은 무엇을 상징하던가요? 깨끗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죽음' '공포' '고독'을 주로 상징하지 않던가요? 시인이 산수에 대한 진정성이 있었다면 결코 백색으로 시 전체의 색감을 도배하진 않았을 거예요. 백색으로 도배된 산수시에서 감흥을 느끼기란 쉽지 않죠.

 

그런데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어요. "산수시의 색조가 백색이면 무조건 감흥이 없는거냐?" 물론 그렇진 않을 거예요. 진정성이 없는 무미건조한 백색이기에 감흥이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시인은 어쩌다 무미건조한 백색으로 시를 도배한 걸까요? 그건 이 시의 표현 내용과 관련이 있어요. 이 시의 제목을 가리고 내용을 읽어보면 이 시가 꼭 경포호를 그린 거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다시 말하면 그냥 범범한 표현으로 경포호를 그렸다는 거예요. 호수의 풍경을 그릴 때 물안개와 갈매기를 등장시키거나 호수를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표현법이죠. 호수 밖 풍경을 그릴 때 백사장을 지나는 나귀를 그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구요. 경포호에 대한 진솔한 감정이 없기에 상투적인 표현을 빌어 경포호를 그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백색이 주조를 이루는 무미건조한 산수시를 지은 거예요.

 

그런데 또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어요. "한시에서 상투적인 표현은 흔한 것 아니냐? 상투적인 표현을 써서 무미건조한 시가 됐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꼭 그렇진 않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문제는 상투적 표현을 너무 손쉽게 사용한다는데 있어요. 고심 끝에 어쩔 수 없어 상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 하고 손쉽게 상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죠. 전자는 독자에게 감흥을 줄 수 있지만, 후자는 식상함만 안겨주죠. 안축의 산수시는 후자라고 볼 수 있어요. 하여 감흥을 주지 못하는 거예요.

 

문학 작품의 감상은 아무리 객관적 기준을 제시한다 해도 상대를 설득하는데는 한계가 있어요. 안축의 산수시를 나름대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비판해 봤지만 사실 그 근거 자체도 어찌보면 주관적인 근거라 설득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안축의 산수시를 좋게 보는 이들도 분명 많을 거예요. 그래서 널리 회자됐고 저렇게 시비(詩碑)까지 세운 거겠지요(사진은 인터넷에서 얻었어요. 경포호 주변 한시 공원에 이 시비가 있다고 해요). 혹 안축의 작품에 호감을 가진 분들은 저의 마뜩잖은 평가에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이렇게 이 시를 볼 수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어떨까 싶어요.

 

작품에 나온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晴은 본래 夝으로 표기했어요. 夝은 夕(저녁 석)과 生(星의 약자, 별 성)의 합자예요. 비가 개어 밤 하늘에 별이 보인다는 의미예요. 갤 청. 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晴明(청명), 晴天霹靂(청천벽력, 급격한 변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泛은 氵(물 수)와 乏(살가림 핍)의 합자예요. 뜨다라는 의미예요.  氵로 의미를 나타냈어요. 乏은 음(핍→범)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에 뜰 때는 화살에 맞는 것을 가리는 나무판(乏)같은 것에 의지해 뜬다는 의미로요. 뜰 범. 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泛舟(범주)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넓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해요. 泛稱(범칭, 넓은 범위로 쓰는 명칭).

 

扁은 戶(지게문 호, 한짝 문)와 冊(책 책)의 합자예요. 문 위나 옆에 붙인 현판(冊)이란 의미예요. 현판 편. 본뜻에서 연역하여 작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해요. 작을 편. 扁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扁額(편액), 扁舟(편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塵은 본래 鹿(사슴 록)과 土(흙 토)의 합자예요. 사슴들이 뛰어가면서 일으킨 흙먼지라는 의미예요. 티끌 진. 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塵埃(진애), 粉塵(분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驢는 馬(말 마)와 盧(밥그릇 노)의 합자예요. 나귀라는 의미예요. 馬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盧는 음(노→려)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색깔이 거무스름하며 조악한 밥그릇(盧)처럼 말[馬] 비슷하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나귀란 의미로요. 나귀 려. 驢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驢輦(여련, 나귀가 끄는 수레), 驢鳴犬吠(여명견폐, 나귀가 울고 개가 짖다. 졸렬한 문장이란 의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緩은 糸(실 사)와 爰(이에 원)의 합자예요. 느슨하다, 느리다란 의미예요. 糸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爰은 음(원→완)을 담당해요. 느슨할(느릴) 완. 緩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緩急(완급), 弛緩(이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疾은 疒(병 력)과 矢(화살 시)의 합자예요. 화살처럼 빠르게 퍼지는 질환이란 의미예요. 병 질. 빠를 질. 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疾病(질병), 疾走(질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안축하면 떠오르는 건 경기체가인 '죽계별곡'과 '관동별곡'이에요. 경기체가는 무미건조한 시가예요. 여러 대상을 나열하고 끝에 가서 '이 모습 어떠합니까?'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이 경기체가거든요. 국문학사에서는 여말 신흥 사대부의 정서 - 심(心)보다 물(物)을 중시하는 - 를 반영하는 시가라고 평가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는 시가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승경의 나열에 불과한 짧은 산문에 가까워요. 이런 경기체가를 지은 안축이다보니 산수시도 위와 같은 무미건조한 작품을 지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물론 이 결론은 무리가 있어요. 그의 작품 전모를 읽어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고 침소봉대하여 내린 결론이니까요. 후일 그의 작품 전모를 읽을 기회가 생겨 이런 생각이 맞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가늠해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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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9-0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시는 좋은 반례로서 인용되었네요.
그냥 읽고 넘어가기 아까운 글들을 매번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맘 먹고 한편 한편 공부해볼까 결심을 부르는 내용들이어요.

찔레꽃 2018-09-08 20: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

무심이병욱 2018-09-1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을 다해 쓴 설명에 감복합니다. 한시도 감동을 주곤 하는데 찔레꽃 님이 분석했듯이 안축의 한시는 감동 주지 못하네요. 사실 한시의 도구인 한자가 뜻글자로서 ‘시어‘로서는 아주 좋지요. 한시에 쓰인 한자들이 시각적 이미지라든가 청각적 이미지를 일으키는 역할로는 그만한 게 없지요. 나아가서는 공감적 이미지까지 일으키는데 무심은 경탄을 금하기 어려웠던 기억입니다. 물론 교직에 있었을 때 국어 시간에, 이백이나 두보의 작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겪었던 일입니다.

알라딘 창작 블로그 시절, 찔레꽃 님과 무심의 글이 수시로 함께 게재되곤 했는데 -----추억이 되었나 봅니다.


찔레꽃 2018-09-16 19:38   좋아요 0 | URL
˝정성을 다해 쓴 설명에 감복합니다.˝ 무심 선생님의 말씀에 저 또한 감복합니다. 무심 선생님은 글 배면을 꿰뚫어 보는 맑고 밝은 눈을 가지신 듯 합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건강이 안좋으셔서 병원에 가셨던 듯 싶은데....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요즘 일교차가 커서 감기 걸리기 쉬운듯 합니다. 유의하셔요~

선생님의 글을 늘 읽고 있습니다만 섣불리 댓글 달기가 어려워 - 어설픈 댓글로 결례만 범할 것 같아 - 그저 보고만 나오고 있습니다. ^ ^

무심이병욱 2018-09-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려 덕에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떤 댓글도 저는 반갑습니다. 제 글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찔레꽃 님처럼 글에 정성을 다하는 분의 댓글이야 더 말 할 게 있습니까!

저는 요즈음 내년초에 발간 예정인 ‘작품집 2편‘ 준비로 소설 쓰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기분 전환 겸 밭에 가서 농사도 짓습니다.
찔레꽃 님의 변함없는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