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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서른 아홉 번째 서평
수박향기-에쿠니 가오리 / 김난주 역
순수. 냉정. 혹은 야살스런
에쿠니 가오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일본작가라는 사실 하나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의 작가론이나 그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접해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쿠니 가오리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열렬한 팬도 많아 보인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 없이 무작정 소설 읽기를 시작했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내게 도움을 주는 일인지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일인지 잠시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 작가의 이전 작품이 지니는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 무지하면서도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작가를 만나는 일은 어설픔과 묘한 흥분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미묘함. 작가는 짧은 단편 소설의 모음으로 구성된 이번 소설집에서 미묘함이라는 단어의 표현과, 작품 안에서 이 단어가 주위의 것들과 어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복잡한 교감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11편의 단편이 실렸고, 대부분의 소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비슷하게 이어지는 듯하다. 물론 대부분의 이들이 동일시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요소인 이 작가의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간과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문장은 대체적으로 감각적이다. 시처럼 간결하게 리듬이 느껴지는가 하면, 때로는 밉지 않게 오감을 흔드는 자극적인 요소를 발산한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감각적인 단어와 문장을 적절한 타이밍에 잘 맞춰 넣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은 스토리가 갖는 서사성 보다는 사건을 중심으로 몰입해간다는 것과 감각적 문장이 받쳐주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이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오정희의 작품들이 생각난다. ‘유년의 뜰’, ‘새’ 혹은 ‘중국인 거리’와 같은 소설의 제목이 불쑥 튀어나오는 까닭은 아무래도 에쿠니의 문장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긴 한데 소설을 읽으면서 각각의 작품이 품고 있는 주제를 찾아내기가 참 묘하더란 말이다. 물론 굳이 정석대로 분석해서 붙인다면 할 말이야 많긴 하겠지만, 시크하면서도 유니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이 작품집에 정석대로 주제를 붙이기에는 어딘지 어색하지 않을까.
밑도 끝도 없이 예쁘게 감각적이다, 일반적인 스토리의 전체적인 개연성보다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몰입하는 정도가 강하다, 는 것이 내가 읽은 에쿠니의 ‘수박향기’의 전체적인 인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이 이 작가의 매력인가도 싶다.
작가는 그녀의 소설에서 그녀의 문장에서 그녀가 만들어내고 배열하는 모든 어휘에서 질서와 안도감을 찾아 느끼는 것일까. 문득 작품 속에서 내 시선을 붙잡고 늘어지던 표현 하나가 생각난다.
-보송보송한 타월은 따뜻했고, 질서와 안도의 냄새가 났다-(134P)
해설부분에 실린 가와카미 히로미의 글은 냉정함을 살짝 상실한 듯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편단심 문장에 대한 극찬이 이어지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객관성이 흔들리는 듯한 인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역자 김난주의 이야기가 더 신뢰가 간다.
김난주가 언급했던 ‘감정의 원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형이라는 말에 융이 생각이 난다. 칼 구스타프 융의 ‘원형이론’을 접목해서 에쿠니의 작품을 다시 읽어본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 보인다. 원형이론으로 다시 만나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한층 더 깊이감 있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딘지 모르게 야살스러워 보이는 이 미묘한 내면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으면 은근한 중독성에 긴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