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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스케치 노트 ㅣ 스케치 노트
아가트 아베르만스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진선아트북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서른 여덟 번째서평
식물 스케치 노트-아가트 아베르만스
그림 그리는 그림책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본적이 있을까. 여학교시절 점심시간에 늘 도서관 서고로 도망을 다녔다. 점심을 먹고 난후 대운동장으로 나와 운동 할 것을 강요하던 선생님들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까닭이다. 책을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몽둥이 하나 들고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체육선생님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좋은 곳이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누드 크로키에 관한 책을.
하필이면 누드 크로키가 뭐란 말인가. 사춘기에 막 접어들었던 여학생 신분이었던 내가 일반 스케치북보다도 더 컸던 그 책을 대여해서 집에 가지고 갈 요량으로 버스에 올랐을 때 그 낯 뜨거웠던 기억이란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가보다.
화실이란 곳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것도 딱 일주일만큼의 시간만 할애했다. 처음 화실에 들어갔을 때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석고상이 주는 분위기에 압도당했고, 다음으로는 화실에서 느껴지는 묘한 냄새에 흠뻑 취했던 기억이 난다. 4b연필의 냄새였는지, 제법 두꺼웠던 4절지 크기의 종이에서 나오는 냄새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석고상에서 나는 냄새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원형의자에 앉아 허리를 세우고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척 힘이 들었지만 정말이지 뿌듯하게도 비너스도 그리고 줄리앙도 그렸던가보다.
하지만 소설처럼 드라마처럼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던 꿈은 일주일 만에 깨끗하게 접히고 뒤로 버려졌다. 고가의 물감을 사라고 강요하던, 고가의 연필을 사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겠지. 그때 나는 윤리선생님이 이야기하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상대성을 비교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책 이야기 좀 해보자. 지루할 만큼 늘어난 사설도 이쯤에서 정리하고 아가트 아베르만스의 책 ‘식물 스케치노트’에 집중할 일이다.책의 초입과 말미에서는 스케치와 세밀화의 유래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한 역사를 잠시 짧게나마 소개하고 있다.
책은 쉽게 말해서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재료의 소개와, 사용법을 시작으로 다양한 ‘그리기 기법’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재료와 사용법 그리고 스케치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기본 형태를 잡고 볼륨 내지는 음영과 같은 중요하면서도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숙지한 이후에 실질적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디테일한 부분을 알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보인다.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있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 중에 ‘관찰’을 강조한다. 세밀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관찰이 이루어졌는가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일이라는 말이 된다. 집중해서 관찰하기가 먼저이고 집중해서 그림으로 표현해내기가 차선의 일인 셈이다.
색을 다루는 법에 있어 물감과 물의 비율이라든지, 색과 색의 혼합비율에 대해, 그리고 종이 위에 색을 입히는 방법과 그 과정 또한 시종일관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한층 더 유연하게 읽히는 듯하다.
익숙하지 않은 갖가지 꽃과 풀들이 등장하면서 책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도감과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단 하나의 간결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그리는 이의 끈기가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누군가 성격 급한 사람이라면 저자의 책을 보면서 따라하다가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지는 않을까. 가벼운 근심 한 자락 남겨볼 일이다.
책은 꼼꼼하고 섬세하며 어딘지 모르게 전체적인 분위기가 낭창낭창하다. 예쁘고 정성스럽다. 독특한 향기가 나는 책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