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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처럼 -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
송인혁.은유 지음 / 미래의창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서른 네 번째 서평
황제처럼- 송인혁 사진. 은유 글
황제펭귄의 초대
주인공은 펭귄이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고담시의 지하도시 어딘가에서 모략을 꿈꾸며, 자괴감으로 지리리 궁상을 떠는 그런 펭귄이 아니다. 눈과 빙하가 마주하고 있는 곳 바로 남극에 사는 펭귄이 책의 주인공이다. 퇴화한 날개는 더 이상 하늘을 날아오를 수는 없었지만, 날렵한 유선형의 몸체로 물속에서 재빠르게 물고기를 낚아채는 동물 이야기다. 이 낯설면서도 신기한 동물에게 사람들은 황제라는 칭호를 붙였다. 황제 펭귄.
책은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다. 우선 생물학적이며 생태학적인 관점이 그것이다. 자연다큐멘터리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펭귄의 세계. 생존과 번식이라는 거대 테마 안에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며 순응하는 펭귄들의 세계를 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책은 자연의 눈으로 살펴보는 펭귄만을 다루지 않아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아주 감상적이면서도, 감성이 묻어는 이 책의 글과 사진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이것은 한 생명에 대한 기록이면서 살아있음, 그 품격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띠지 인용)
두 번째로 접근하게 되는 관점은 생태적 접근이 아닌 사회 문화적 관점의 접근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책은 펭귄의 일생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본성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인 인간성에 대한 갈망 내지는 깊이 있는 사색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펭귄들의 삶을 기록하고자 했던 고된 작업을 이행해온 두 사람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고독감, 내지는 그리움이라는 사변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그들만의 고백 속에 등장하는 ‘멜랑콜리’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의 펭귄이 무리를 이루는 것을 ‘루커리’라 했다. 혼자서 살수 없는 존재의 의미에서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사회성을 보는 듯하다. 남극의 극심한 추위 때문에라도 펭귄은 본능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는가보다. 집단(루커리)을 이루고 짝을 찾고, 알을 낳으며 다시 그 알을 품는 과정에서 우리는 남극에 사는 황제라 불리는 거대펭귄의 일대사를 보게 된다.
알을 낳아 품어 새끼를 기르는 일, 집단의 안정성을 확인하는 펭귄무리의 ‘루커리’와 무리의 가장 외곽에 있는 펭귄과 안쪽에 있는 펭귄의 무리가 일정한 룰에 의해 위치를 바꿔간다는 ‘허들링’과 같은 행동들은 사실 본능과 집단에서의 사회성 양자 간에 어느 쪽으로 확고하게 단정 짓기에는 좀 그 경계가 무르다
이를테면 일련의 과정들은 생명체의 본능인 동시에, 집단 내지는 조직과 사회적 측면에서도 쉽게 이해가능한 일종의 정해진 사회성과도 일면 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암컷에게 알을 넘겨받은 수컷의 부성애만큼은 외면하기 어렵다. 4개월 동안 이들 수컷들은 본의 아니게 단식을 하게 된다. 그들 스스로는 단식을 하면서도 겨울을 나기 위해 미리 뱃속에 저장해두었던 먹이를 새로 태어난 새끼에게 아낌없이 내어준다. 제 살과 뼈를 으깨어 새끼에게 나누어주는 셈이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측은하다. 그러나 무척 대견해보인다. 대자연의 위대한 존엄을 알리는 듯한 남극이 간직한 풍광에 눈이 시리다. 펭귄의 삶을 인간의 그것과 견주어 생각하면서 책은 한권의 시집처럼, 한권의 명상록처럼, 독자에게 유연한 침장沈潛의 심오한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책의 말미에는 저자들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에필로그가 실렸다. 펭귄의 삶을 기록하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인지라 사람 이야기가 들어가야 제 맛인가 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대목은 이런 것이 아닐까. 에필로그를 접하고 있노라면, 이 책의 기획 의도가 혹은 목적의식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정리할 때 어디까지 열린 결말로 한정을 지어야 한다는 규제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해지지 않은 자유 선택에 의한 결말과 결론이 가져오는 관대함과 더불어 약간의 혼돈이 개인적으로는 생각의 꼬리를 연이어 잇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가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에서 기인하는 말이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 책에 대한 해석은 시종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보이는 그대로의 책, 보이는 그대로의 이야기만으로도 생각은 나날이 풍성해질 수 있다. 굳이 친절한 설명이나 부연이 아니더라도 독자는 그들만의 상상력과 깊이감 있는 사고의 이중주를 통해 독자 나름의 공간을 확보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대화를 제외한다면 책은 분명 진정성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잠시 황제펭귄의 초대에 열일 제쳐 두고 앞만 보면서 남극에 다녀온 기분이 든다. 다시 생각해보니 고놈들 참 의연하게 잘도 생겼더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