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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스물 아홉 번째 서평
악당들의 섬-브루스 디실바
스릴러에 살짝 안긴 느와르
학교 다닐 때 시나리오 관련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 집중하고 싶었고, 좋은 학점을 받고 싶어서 비디오 대여점에서 문제의 비디오를 빌려오기도 했지만 결국 가지고 다니다가 비디오 한 귀퉁이를 깨먹는 사고를 쳤다. 그다지 큰 비용을 내지는 않았지만 대여료 외에 얼마를 더 내야했기에 김이 빠진 나는 학교 근처에 있는 비디오방을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전부 뒤져 교수가 내준 숙제로 문제의 그 비디오를 접수하는데 성공했다. 요즘 누가 이런 오래된 영화를 찾느냐는 핀잔이 날아왔지만 금덩어리라도 얻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뻔뻔했었던가 보다. 우리는 열시부터 시작했을 수업을 당당하게 빼먹고, 어둡고 좁은 방에 들어앉아 과자 부스러기와 탄산음료를 마셔가면서 영화 내용을 분석해야만 했다.
2학기가 되고 나는 문제의 시나리오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다.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어중간한 단발머리의 깐깐한 인상을 주던 시나리오 교수는 학생들을 들들 볶는다는 소문이 있었고, 나는 슬슬 교수를 피해다녔다. 하지만 한때 그녀의 수업을 들었던 것을 감사한다.
평생을 기자로 살아온 브루스 디실바가 노년에 세상에 내놓은 걸작이 ‘악당들의 섬’이라고 한다. 표지에 찍힌 여러 개의 수상 이력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반신반의했었다. 광고가 갖는 과장의 형식과, 알면서도 다시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묘한 심리적 반응에 대해 굳이 딴지를 걸 필요는 없어보였다.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탐정소설의 형식을 갖췄다. 형식적인 틀은 탐정소설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는 영화로 치자면 느와르라는 조금 장르가 섞여 있다. 조직폭력 집단과의 복잡한 관계가 그것이다. 주인공 리엄 멀리건은 저자가 그랬듯이 신문사 기자로 등장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에서나 발전 면에서 많은 부분 낙후된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이 곳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연이어 일어나는 화재 사건을 조사하는 주인공 멀리건은 소설 속에서 무기력하고 무능한 공권력과의 뻣뻣한 대립을 이루며 혼자 사건을 따라다닌다. 그러면서도 일정부분 그들과의 야합?을 이루기도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영원한 아군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멀리건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로 사진기자 ‘글로리아’와, 멀리건에게 기자 수업을 받기를 원하며 스스로 자청한 신문사 지주의 아들 ‘메이슨’, 주인공 멀리건과 애정관계를 형성해나가는 인물 ‘베로니카’와 그 외 멀리건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인물들로 구성되고 있다.
소설 후반부에 살짝 등장하는 가벼운 반전이 없었다면 어쩌면 소설은 아주 평이하게 흘러가서 종점을 찍었을 법하다. 솔직히 살짝 드러나는 반전은 너무 힘이 약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소설에 대한 느낌은 안정감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소설이 갖는 안정감, 문장과 문맥이나 등장인물의 대사 혹은 사건과 사건의 밀접한 관계와 그 전개과정에서 특별하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부분이 없이 빠르게 잘 읽혔던 것 같다.
주인공들의 특성을 똑 부러지게 그려내고 있는 각 인물들의 대사가 작품 속에서 시원스럽게 잘 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탁구공 주고받듯 생동감 있는 대사가 오고 가면서 동시에 전반적인 소설의 전개 역시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재미를 더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보통의 예상을 뒤엎을만한 사건 내지는 반전의 부재가 아쉬웠던 것 같다. 탐정소설이긴 한데 탐정소설을 큰 범주에 떠안고 있는 스릴러라는 장르와는 반걸음 떨어져 있는 듯 하고, 또 느와르 장르와의 관계도 어딘지 모르게 끈끈하지가 않다. 작가가 조금 조심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각설하고 소설은 소설로 읽고 만족해야 하는 법인가. 그렇다면 만족한다. 어느 면에서 갖게 되는 아쉬움은 밀어두고, 새벽 두시 반에 누워서도 미련을 못 버린 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삼십분을 더 읽다 잠이 들었다. 자주 등장하는 야구 이야기에는 그다지 큰 공감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소설 속 인물 중에 멋진 소방대장으로 등장하는 ‘로지’가 막 좋아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 옛날 냉랭한 강의실에서 봤던 영화 ‘양들의 침묵’이 생각나는 걸까. 그 영화처럼 속이 후련한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 건 사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