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한비자 법法 술術로 세상을 논하다 만화로 재미있게 읽는 고전 지혜 시리즈 1
조득필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스물 두 번째 서평

만화 한비자 (법술로 세상을 논하다)-조득필

 

만화로 보는 한비자

 

  한비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공자 맹자 장자는 그나마 친숙한데 한비자는 아주 낯설다. 뭐 하던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조득필의 ‘만화로 보는 한비자’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읽다보니 남들은 쉽게 읽는다는 만화책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뒤죽박죽 꼬이는 것을 느낀다. 한편 한편의 소 단락으로 보는 만화는 주제도 명확하고 내용 또한 어렵지 않아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하나의 주제 안에서 전체적인 연결고리를 따져 보기 시작하니 자꾸만 어려워진다.

  조득필이 소개하는 한비자를 쉽게 보기 위해서 적어도 한비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 그가 주장한 학설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제자백가 춘추전국을 논하던 시간에 유독 한비자는 왜 그 존재감을 내게 남겨주지 못했던 것일까.

  각설하고 인터넷을 뒤져 그의 행적을 쫒다보니 요즘 유행하는 저속한 표현을 빌려쓰자면 신상털기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나는 한비자에 대해 신상털기라도 하고 싶은 걸까.

 

  김원중 역으로 출간된 한비자의 목차를 훑어보면서 다시 조득필의 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어떤 기본 바탕이 되는 텍스트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 조득필의 책을 접했을 때 만화라는 구성이 가져오는 장단점에 대해 생각했었던가 보다.

  내용보다는 편집과 구성면에서 이야기를 남겨야 할 듯하다. 이를테면 이번 책이 갖는 장점이라면, 간단하고도 쉬운 접근법과 요약의 묘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 기인한 단점 또한 시시콜콜하게 딴지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한가지 주제에 의한 내용임에는 분명한데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없어 보인다. 저자는 편집구성에 있어서 「고훈 오버랩, 고훈의 교훈, 고사의 교훈」과 같은 제목으로 추가적인 내용을 삽입하고 있다. 고훈 오버랩은 그렇다 하더라도 ‘고훈과 고사의 교훈’이 갖는 어휘의 명확한 차이점을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두 가지의 소제목 하에 실린 내용들도 사자성어라든지 성인의 명언, 구체적으로 거론한 책들 중 논어, 채근담 등과 같이 당양한 분야에서 인용을 하고 있지만, 이 부분 역시 양측이 서로 엇비슷한 내용들이었다.

 

  한자어 표기가 빠졌기 때문일까. 고훈이라면 한자어 표기가 없어 똑 부러지게 지적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략 ‘옛 사람들의 교훈’으로 표기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사는 어떨까. 다양한 풀이 중에 ‘유래가 있는 옛날의 일. 또는 그런 일을 표현한 어구’를 가져와 생각한다고 해도 고훈과 고사는 크게 다르지 않은 비슷한 어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때는 한자어 표기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고전에서 좋은 글과 해설을 인용하면서 충분히 이 편집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만을 따로 본다면 흠 잡을 데는 없다. 그렇긴해도 무언가 정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훈 오버랩에서나, 고훈의 교훈이나 고사의 교훈을 통해 책 내용과 더불어 참고할만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실었으면 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애쓴 노력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 편집과 구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딘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게도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중이다.

  책은 한비자의 법치주의에 입각한 그만의 철학을 예에 적용하면서 풀어내고 있다. 각 단락이 시작되는 장에서 내용의 간략한 소개와 함께 단락이 마무리 될 때마다 친절하게 덧붙인 평설은 비록 앞장에서의 내용을 100프로 요약 정리차원은 아니더라도 한비자를 알아가는 데 어느정도 도움을 제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속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 이를테면 왕과 신하의 처세술과 정치관련 노하우(이 표현이 적절한지 고민 중이다)는 수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사뭇 진중한 의미로 다가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부리는 방법, 나라를 이끄는 방법, 더 세밀하게 들어가며 나를 다스리는 방법에까지 빛나는 지략이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는 분명 그 사람을 무탈함 가운데 현명하게 이끌어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기록한 고사의 교훈 중 ‘미생(尾生)의 신의(信義)’를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기록한다.

저자는 ‘미생의 신의’라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강직함 내지는 신의와 절개를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미생과 관련한 해석 두 가지가 상반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무척 재미가 있는 부분이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 갖는 또다른 의미는 우직함과 강직함 절개를 떠나 고집불통, 융통성의 부재가 부각되곤 한다.

 

  책에서 한 가지 주제에 맞는 내용만을 싣기보다는, 내용과는 별도로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같이 실어주면서 객관성을 확보하면 어땠을까 하는 개인적인 사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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