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열 일곱 번째 서평

출항1.2 -버지니아 울프

 

무엇을 위한 출항일까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와 부조니의 샤콘느는 닮은 꼴이다. 바흐의 원곡을 부조니가 편곡해서 새로 편집해 내놓은 곡이기 때문이다. 이들 샤콘느의 특징은 비슷한 선율로 시작하면서 서로 다른 음색을 자랑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서로가 비슷한 분위기의 마무리를 만들어간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다르면서도 같다는 말과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는 말은 엄밀히 말했을 때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원곡과 편곡 후의 곡을 차례대로 듣는 일은 나름 의미 있는 일 중에 하나이다.

  샤콘느와 버지니아의 소설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에 대한 이미지는 바흐와 부조니의 음악처럼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서로가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큰 맥락에서 봤을 때 같은 점성을 유지해가면서도, 세밀하게는 깊은 심연에서 각각의 것들이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지는 울프만의 글 쓰기가 어딘지 모르게 이들 샤콘느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가싶다.

 

  버지니아를 읽어내겠다고 한 것은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목마와 숙녀에서 살짝 등장했던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이미지는 시종일관 센티멘탈 수준에서 고정되었던가 싶다. 어떤 계기나 동기부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전에 알게 된 작가 전혜린을 생각하면 늘 버지니아가 따라다녔다. 왜였을까.

전혜린의 글을 접하면서 그만의 강한 작가적 향취를 따라가다 보면 늘 종착점은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라고 노래했던 노천명이 아닌, 버지니아라는 사실에 종종 낯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소설 ‘출항’을 읽어내는 일은 길고긴 여정이었고 솔직히 이 여정 속에 한동안 갇혀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하고 확고하게도 무언가를 보고 느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은 여느 번역물에서 보이는 자잘한 문제점들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늘어지는 호흡으로 길어지는 문장, 같은 어휘의 남용이 전체 소설 중에서 몇 군데가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소설은 아주 원대하고도 큰 이상을 품고 있으며, 작가 스스로가 꿈꾸었을 무언가를 실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절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작가 버지니아의 작가적 고충이다. 한편의 작품을 두고 세인들은 늘 그렇듯 여러말을 주워섬긴다. 비평가들은 그들 각자의 식견에 따라 작품을 해부하고 살을 붙이며 이를테면 독자에게 책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가르쳐주기 바쁜데 버지니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항을 두고 이 작품이 의미하는 주제와 작가적 페이소스에 대한 생각은 개인적으로도 너무나도 많았던 것 같다. 다만 버지니아의 작품을 페미니즘 성향으로 논하거나, 비교적 진보성향의 이미지를 빌려왔다는 이야기에 사뿐히 너무나도 가볍게 편승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나는 욕심을 부리는가. 타인의 것이 아닌 나만의 것으로 바라보는 버지니아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내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전혀 새로운 버지니아를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참 힘이 들었다고 엄살을 떨고 싶어진다. 어느 날은 해가 비치고 또 어느 날은 우울하게도 하늘이 온 종일 흐리다가 어느 날은 급기야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버지니아의 소설은 다양한 색감을 지녔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읽어냈을 때와 깊이 정독했을 때의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트릭에서 벗어났을 때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이 작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작가는 독자에게 끊임없는 주문을 제시한다. 그녀는 쉽게 말하지 않으면서 긴요한 상황을 침착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사실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펼쳐내는 독심술과 같은 느낌의 이 길고도 까다로운 트릭을 하나씩 벗겨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성이 담긴 작가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버지니아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애정이 가는 작가라는 사실에는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책은 대화나 서사 외에도 상당부분 묘사가 등장하는데, 인물이나 각인물의 심리묘사를 그려감에 있어 배경과 적절히 접목해 가며 묘사하고 서술해가는 방식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여전히 가볍게 편승하기는 싫지만 각설하고, 패미니즘에 입각한 시각으로 보는 시점에서 주인공 레이첼의 시선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이러한 요소를 반영하는 현실이라는 문제 앞에서 주저와 갈등 그리고 비판을 주고받는 주인공들의 미묘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 작가 버지니아의 열정을 여실히 보고 느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러니하게 소설은 사랑이라는 어떤 클래식한 섬세함 속에서도 부단하게 벌어지는 정치 사회적 차별과 이에 대한 극복이라는 인식을, 여성이라는 주체에 투영해가며 작품을 이어가고 있다. 버지니아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는 비판적인 생각을 작중 주인공 여성 레이첼이 아닌 남성인 약혼자 휴잇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볼 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책의 말미에 수록된 해설을 읽어본다면 보다 명확하게 이유를 알 수 있다. 제목인 출항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도전일까. 인식에 대한 새로운 혁명일까. 해설 부분에서도 제목이 상징하는 바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출항의 의미를 고착화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탈출의 이미지로 생각하고 싶어진다.

  뒷부분에 실린 옮긴이 진명희님의 해설부분도 꼭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해설 부분을 모두 추종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시각에 따른 비평이 지속적인 자극제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다시 버지니아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 될 일이다. 그렇긴 한데 쉽게 내뱉지 않은 진중한 매력을 지닌 버지니아의 글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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