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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신 - 죽음도 불사했던 강직한 선비들
고제건 지음 / 리드잇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아흔 일곱 번째 서평
직신-고제건 지음
직신(直臣)이란
번데기 앞에서야 주름잡기는 뭐한 일이다. 역사를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야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물을 좋아하기는 하나보다. 역사를 다루는 책을 보고 있으면 일정부분 복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역사가 주는 이미지가 어느정도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든 간에 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고제건이 쓴 직신은 역사물이다. 강직하게도 곧은 말을 하는 신하라는 뜻이라고 해설할 수 있을까. 저자에 대한 이력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다. 그가 역사를 전공했는가의 여부를 따져서 가치를 결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책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들여다볼 일이다.
역사가 현대사회에서의 크고 작은 쟁점을 교류한다는 차원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을 가져온다고 한다면, 고제건의 직신은 현 정치적인 시류와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 아닐까.
직신을 읽는 동안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가져다 놓았다. 김태완의 ‘책문’, 신봉승의 ‘문묘 18현’과 신동준의 ‘臣의 한수’ 그리고 안대회의 ‘고전산문산책’등과 퇴계 관련 책들이 책상 한 쪽에 쌓여갔다. 더 많은 조선의 역사물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 책들을 전부 꺼내놓고 들여다보고 비교하면서 책을 읽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직신은 역대 조선의 왕조시대를 통해 불의에 대응하면서 그들만의 뜻을 굽히지 않고 신하로서,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로서의 절의를 지켜냈던 이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은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간단명료하다는 표현이 이 책의 상반된 느낌을 극명하게 대변하게 해주는 듯하다.
직신의 기획 의도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책과 일정부분 닮아있다. 내용면에서 중복되는 내용은 한 두 건이긴 했지만, 비슷한 주제로 출간되는 책의 중복된 내용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각설하고, ‘1장, 직언(直言), 선비 목숨을 걸다. 2장, 직신(直臣), 강직하고 올곧은 신하, 3장, 직설(直說), 조선을 조롱하다’.의 세부분으로 나눠 이야기를 끌어가는 책에서는 각각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행보와 전반적인 개인사적 이야기로 내용을 끌어가고 있었다.
보다 직설적이면서 정치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을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면, 이번 책은 다소 미지근한 감각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다만 책은 일종의 조선의 역사라는 시대적 배경 중심에서, 다방면의 정보제공을 통한 역사와 충신의 이해도라는 측면에서는 다양한 연령층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게 비교적 핵심을 요약해 저술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세세하게는 고제건이 소개하는 허균의 이야기에서 약간의 생경스러움을 접했던 것 같다. 이것을 역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이고, 무엇에 중심을 잡고 썼는가 하는 문제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이제 죽을 자리에 왔다’(사암 박순/직신)의 이야기라든지, ‘도끼를 들고 상소문을 읽는다’ (문열공 조헌/문묘 18현)과 같은 표현들과 내용들이 더 설득력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까닭은, 고제건이 선정한 인물 중에 특히 김시습과 혀균이 갖는 이미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미비한 차이로 직신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것을 직접적인 행동과 간적접인 행동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직신이라는 어휘가 품어내는 강직한 분위기에서 그 어떤 변명도 도끼를 들고 목숨을 내놓으면서 상소를 올리는 이미지와 대견할 수는 없어보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고제건의 문체는 어렵지 않아 좋았다. 겉멋을 생각하지 않고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한 채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면서 써내려간 그의 글 자체는 좋았던 것 같다. 다만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접하게 되는 문제점을 생각할 때, 최근에 일정부분 회의감을 받아 스스로 걸러내야 했던 것들을 감안하다면 고제건의 역사물 또한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껴안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사견이다. 분명한 사견이다. 그런데 왜 내가 책의 객관적 시선을 유보한 채 사견을 운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괜찮은, 정말이지 정말 괜찮은 책들을 더 많이 봐야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혼자만의 치료책을 간구하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어설프게 보이기까지 하다. 역사는 매료될수록, 치명적인 무언가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의 다양성이 가져오는 위험성(위험성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과 이도저도 편중되지 않기 위해 딴은 너무 가볍게 역사를 끄집어내는 시류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 기록한다.
“번거로움을 바로잡는 데에는 고요만한 것이 없고, 졸렬한 것을 바로잡는 데에는
부지런만한 것이 없다.”
(p92 직신-고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