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4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주석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른 다섯 번째 서평




끝나지 않은 이야기-한중록




역사란 아이러니하게도 당대보다는 후대에 의해 객관성을 유지하며 명확한 평가를 받는 듯하다. 시대적으로나 현실성에서 다소 멀어지고 흐려지는 감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대가 아닌 후대의 판단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조선조의 실록은 기록한 이의 사관과 더불어 당대의 정치적 흐름과 감추어진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왕의 자질도 문제겠지만 당대의 정치적 성향에 의해 과하게 의도된 채 부각되거나 혹은 삭제되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고 다시 한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주관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비껴볼 줄 아는 여유가 생기는 것일까? 전대의 결과를 뒤집어엎을 만한 놀라운 반전의 결과물을 꺼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 조선의 정치판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또한 갈라진 당파들의 등락에 따른 결과물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조선의 분당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을까. 불행 가운데 다행스런 일은 딱딱한 한자어로 씌어진 오백년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이슈와 더불어 구중궁궐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범하지만 딴은 비범하지 않은 이들의 희노애락이 담긴 스토리를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대중매체나 학원가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소재가 되긴 했지만 이번 한중록의 배경이 되는 영조, 사도세자와 정조의 이야기가 거기에 들어가지 않을까. 사실 한중록을 알기 위해서는 선대의 이야기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번 책은 영조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시대적 배경은 조금 뒤로 넘어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영조가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당색을 타파하고 융합하기 위한 탕평이라는 개념의 시작은 선대 숙종 대의 다소 불안전한 정치적 흐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숙종이 됐든, 영조가 됐든 사도세자가 됐든 어쨌든 아버지와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 이야기이다. 사사로이 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 조선의 역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며 그 외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배경과 사건들의 배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있으니 바로 아비와 아들 사이에서 힘들게 저울지하며 애달프게 살아왔던 여인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처음 혜경궁의 한중록이 원본에 충실한 번역으로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제야 그 누구의 변명과 그 누구의 정치적 역사적 사관에 빗대지 않은 순수하고 명료한 그녀 혜경궁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런 까닭에 나는 혜경궁에게 변론의 기회를 서둘러 줘야 한다는 생각도 했었다. 시작은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혜경궁의 변론에 만족하는지, 어떤 생각을 머리속에 새로 짜넣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한중록은 혜경궁이 환갑을 넘기면서 각각의 해에 나름대로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쓰기 시작한 실재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한중록은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사도세자의 이야기, 혜경궁 자신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처가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바로 1부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도세자의 이야기 즉 영조의 의해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책은 지금껏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야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도세자 이야기를 한층 격상시키는 데 역량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래전 먹물 들인 붓을 들고 한자한자 써내려갔던 혜경궁에 의해 그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겠지만, 그 가치는 몇백년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짧은 소견으로 봤을 때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만 한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한중록이라 알고 왔던 것에 수정을 가해야 할 것 같다.

혜경궁의 한중록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이미 책 속에서 많이 거론된바 있다. 기존 실록에서 보지 못했던 이야기(한중록은 실록에서 보지 못했던 글, 또는 실록과 다른 견해를 보이는 글을 많이 싣고 있다)의 새로운 발견과, 서술자의 감정이 살아 있는 동시에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나름대로 중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특히나 이 글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고 가족과 손자에게 보이기 위한 용도로 쓰여진 책이기에 더 그 사적인 감정에 충실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를 조선조 역사에서 살다간 어느 왕가의 여인으로만 생각하기에 미련이 남는 까닭은 한 여인으로서, 아내의 자리에서 어미의 자리에서 또는 며느리의 자리에서 정치적 외압에 휘둘리며 살아온 그녀만의 풍파 많은 삶의 가치를 크게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여성만이 갖는 섬세하고 꼼꼼한 시선의 흐름과 혜경궁 특유의 좋은 기억력(정조의 말을 빌자면 혜경궁은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지 않고 잘 기억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으로 정치적사건을 직시하고 있다. 사건의 배경과 배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의 고충을 덤덤하게 때로는 쓰라린 속을 쓸어내리듯 회한으로 가득찬 시선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조 여류문학에서 허 난설헌이 늘 머릿속에서 떠돌았다고 할 때, 허씨와 혜경궁의 차이라면 보다 큰 정치적 배경과 시대적 흐름의 차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더불어 혜경궁에게는 넘지 못할 산맥으로 자리한 시아버지 영조의 존재가 있는 것도 큰 차이 중에 한 가지일 것이다.




1.2.3부 각각의 글들이 쓰여진 시대가 조금씩 차이가 나고 집필 동기 역시 때에 따라 다르다보니 이 장에서 한 이야기가 다음 장에서 다시 거론되는 식으로 중복되는 내용이 없지 않다. 그것을 중복이라고 봐야할지 부연과 보충 설명이라고 해야 할지는 읽는 독자에게 맡길 문제겠지만 말이다.

한중록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크게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그 사건들의 배경과 관련인물 그리고 어떤 종결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서술과 그 영향력을 기록한다. 1부에서는 이런 사건들이 모월 모일에 있었다, 2부에서는 좀 더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이고 3부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각각의 장마다 혜경궁이 중심을 잡고 있는 “집필배경”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도세자에게 초점이 있는지, 자신과 처가에 있는지에 따라 뒤로 갈수록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논하자면 한중록이라는 책 한권을 다 읽고나면 이 책에서 거론되고 있는 역사적으로 의미를 두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예습하고 복습하고 마지막으로 요약정리하는 그야말로 열심히 공부한 뿌듯함을 맛볼 수도 있을 법하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이들이 공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한중록 깊이 읽기’의 편집과 내용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특히나 ‘한중록 깊이 읽기’에 대한 정병설의 관점은 상당히 객관적이라는 점을 중요시 봤던 것 같다. 기존에 몇 역사서를 접했을 때 석연치 않게 받아들여야 했던 저자의 역사관과 기존에 나와 있던 것을 요약과 인용이라는 단순한 방법에 의해 재탄생해온 책과는 분명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 매우 꼼꼼하며 분석적이고 치밀한 노력도 돋보였으며 그 과정에서도 한중록과 조선왕조 실록의 차이에서 객관적 입장과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보였기에 개인적으로 그 가치를 크게 두고 싶은 부분이었다. 이를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과는 별도로 조선조 왕가의 풍습과 정치적 흐름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 독자에게 양질의 지식을 가져다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불어 베일에 가려진 정조라는 인물에 대해 갖게 되었던 의문도 함께 풀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 사도세자는 어쩌면 답이없는 문제였는지 모른다. 정조는 집권 당시 아버지에 관한 일과 외가에 대한 일등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 묘한 행동을 보인다. 정조의 아들 순조에게 그 일을 맡긴다는 말을 자주 기록에 남기고 있다. 자신의 재임기간동안 해결을 보지 않으면서 아들에게 넘기려고 하는 의도에 대해 그 심중에 무엇이 들었나, 의구심이 발동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정병설의 한중록 깊이 읽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노론과 소론 그리고 자신을 지지 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들을 모두 아울러 결속시켜 이끌기 위한 정조만의 정치적인 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사방에서 들고나는 불만을 잠재우고 민심을 수습하듯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각각의 신하들을 이끌고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법하다. 차마 자신의 아버지에게 벌어졌던 뼈아픈 일에 대해 스스로 속 시원하게 풀지 못하고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인물 정조는 그의 정치적 행로와는 별도로 심성 여리고 아비를 그리워하는 한 인간이었음에 분명한 듯하다.




이번 혜경궁의 한중록을 계기로 해서 역사에 대한 인식이 보다 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참에 미루고 있었던 승정원 관련 책과, 고전관련 책에 다시 시선이 가기 시작한다.

조선의 역사는 기록하는 이들이 왕 곁에도 있고 일반 백성인 민심의 중심에도 있었는데, 현대의 역사는 그 사실성과 진실성을 누가 보고 누가 기록으로 남길까. 현대의 역사는 후대의 누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올바로 평가내려 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재봉 2013-06-1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부터 한 번 읽어 보아야지 하면서도 읽지 못하다가.민속박물관대학에서 정병설교수의 강의를 듣고 용기를 내어 책을 사서 읽기는 했는데 나도 한국 말은 꽤 안다고 여겼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무식이 절절히 느껴 졌습지다..이 희승박사의 국어 대사전을 찾으며 읽으려니 진도도 안 나가는것은 고사하고 사전에 안 나오는 단어도 많았으니 불과 200여년동안에 우리 말이 이렇게 변했나 놀랍기도 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나같은 무식한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한중록을 읽기위한 낱말 사전'같은 것이 따로 있었으면 하는 욕심도 부려봅니다...
아무튼 끝까지 읽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한 잘못된 역사적 인식을 바꿔 볼까 합니다....

월천예진 2013-07-12 16:08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님의 글이 저를 반기네요...
감사합니다.
기나긴 장마... 잘 견뎌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