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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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박범신의 산문집이다. 제목처럼 꽤 묵직한 내용이 담겼다. 어떤 느낌으로 책 가까이 다가가야 할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나도 그처럼 순례자의 마음으로 겸허히 책장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겉 표지에 제목과 함께 노란색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높고 깊고 아득한무엇이 그토록 높고 깊으며 아득하단 말인가. 높고, 깊고, 아득하다했는데 나는 모든 단어들이 다 무겁게 다가옴을 느낀다. 이 단어.. 이 수식의 무게감이라니.

 


작가는 곁에 있는 듯하다가 어느새 멀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의 절필 선언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으로 남은 그는 나를 포함한 치기어린 학생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유명 작가였기에 영광이었으며, 더 없는 환영을 불러일으키던 바이칼 호수를 알려주던 그 작가였다. 바이칼이라니.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라니...

 


다시 만난 작가가 반가웠다. 그는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자신은 그의 여정이 스스로에게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왜 길을 나서야만 했을까. 자신을 깨우쳐줄 신을 찾고자 떠났던 것일까. 아니 그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기 위해 떠났던 것일까. 한걸음한걸음 내딛던 순례의 길 위에서 작가 박범신은 내면의 자아와 조우한다.

 


문득 떠남으로써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얻는다는 것은 결국 비워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히말라야의 고지대, 티베트의 맑은 영혼들, 산티아고 길 위의 떨어졌던 눈물. 후회와 인내와 실존의 대한 질문까지 조용히 끌어안고자 했던 이번 책은 작가의 고백서였다. 먼저 떠난 순례자의 뒤를 따르며 이어지는 무거웠던, 그러나 한없이 따뜻한 독백들이었음을 천천히 상기하게 된다.

상념과 상념 사이에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미련이라 정의하는 아쉬움들. 스스로의 의지와는 별개로 타인으로부터 감당해내야 했던 복잡한 감정들. 때때로 작가는 자신의 자책 속으로 분노와 억울함, 수만가지 언어와 말들 속에서 지쳐가는 나약해진 신념들과 마주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작가의 업보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목을 매달아도 좋을 나무, 라는 말을 주워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목을 매달아도 좋을 나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고통일 뿐이다. 모두가 이상이라는 말이다.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자의로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나를 지켜줄 든든한 나무를 헤아리곤 한다.

 


나는 누구이고 문학은 나의 무엇이란 말인가. 이상한 환멸로 폐기 처분한 내 안의 작가는 어느 길가에 버려져 있는가.


 

산티아고 먼 길이 저기,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다.” p228

 


그는 아마도 이 여정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듯하다. 정신이 그리고 그 마음이 그를 먼저 이끌어갈 것만 같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배낭과 지팡이를 챙겨 대자연의 섭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아를 만나 위로하며 또 위로하며 순례의 여정을 떠날 것만 같다.


 

그가 어느날 긴 여정에서 돌아와 다시 책으로 만나길 소망한다. 책 속에 사진 한 장이 기억에 남는다. 자줏빛 감도는 붉은 가사를 입은 티베트의 노스님과 함께 바닥에 앉아 함께 교감하며 웃던 그 모습이, 그 얼굴에 번지던 미소가, 마치 그가 힘겹게 내려놓음으로 인해 새로이 얻게 되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옴마니밧메훔!”

작가 박범신. 순수한 본성의 상태로 마음자리를 옮겨 그렇게 꾸준히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떠오르지만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 또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도 생각납니다. 오해에 불과한 작은 일로 나를 버린 사람, 아집에 따른 어리석은 고집으로 내가 버린 소중한 사람들도 떠오릅니다. 회한은 많고, 갈 길은 멀고, 남은 사랑은 아직도 이렇듯 여일하게 뜨겁습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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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이다. 사설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던 것이 있어 기록으로 남긴다. 책을 보는 동안 일본 작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 깊은 강에 나오는 양파라는 애칭을 가진 그 사내가 자꾸만 생각나더라. 묘하게 닮았다. 위로와 성찰의 이름으로 작가의 얼굴과 소설 속 인물의 그 얼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왠지 이상한 일이다.

손끝이 시리다. 날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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