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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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당신이 버팔로 빌을 잡으면, 캐서린을 무사히 구해내면 양들의 울음소리가 그치 거라고 생각하나? 그 양들도 모두 무사해지고 당신도 어두운 새벽에 양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깨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클라리스?”-p 321

 


꽤 오래된 이야기이다. 원작이 1988년도에 출간되었고 1991년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 이후에도 동일 계열의 여러 작품이 새롭게 등장했다가 사라졌을 법도 한데, 여전히 이 작품이 범죄스릴러의 고전이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왜일까?

 


영어로 된 제목 역시 양들의 침묵이다. “The Silence Of The Lambs”. 궁금하지 않은가. 왜 양들은 침묵하게 되는지. ‘양들이라는 존재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또 그런 행동이 주인공과 소설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실은 그 해답을 글의 서두에 올려 조금은 긴장미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미리부터 지레짐작은 금물이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연쇄살인 사건과 그 범인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중심 등장인물로는 정신과 의사인 한니발 렉터박사와 FBI 요원 클라리스 스탈링, 그녀의 상사 잭 크로포드 그리고 범인으로 집약해볼 수 있다. FBI 교육생인 스탈링은 크로포드에 의해 사건에 직접 뛰어들게 된다. 피해자를 살펴보고 사건 주변을 탐문하며, 한단계 한단계 범인과의 거리를 좁혀가게 된다. 그녀의 행보에 결정적 단서, 내지는 조언을 주는 이가 정신과 의사이자 인육을 뜯어 먹는? 살인범의 신분이라는 설정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감옥에 갇혀있는 렉터박사라는 인물 말이다. 렉터 박사와 클라리스 스탈링은 범인을 잡기 위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어간다. 흔히 하는 말을 빌려보자면 이런 걸 두고 밀당이라고 하는 건가. 이를테면 말이다. 뭔가 집요하고 심오한 감정선이 느껴지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박사는 스탈링의 유년 시절의 상처를 들여다보기를 원하고, 스탈링은 박사로부터 범인의 심리상태와 범죄행태와 같은 중요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왜 하고많은 동물 중에서 양이 등장하는가를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다면 렉터와 스탈링의 이 대화가 등장하는 대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답안에 어느정도 접근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양. 그리고 또 상징의 의미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마 피해자의 목 안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번데기가 아닐까 싶다. 지난 주 어느날이었는지 딸 아이가 문득 했던 말이 양들의 침묵이라고 했는데, 왜 표지에 나방이 등장하는가?’였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나방을 운운하기 전 우리는 먼저 번데기에 시선을 맞춰야 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번데기는 범인을 따라가는 데 중요한 표식과 같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심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대상이다. 소설에서 렉터 박사는 갈망이라는 표현을 통해 범인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해석하는 대목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번데기 역시 그 안에 포함될만한 소재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고 싶어진다. 소설을 접한 당신은 번데기의 상징적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학생시절 작품 분석 시간에 우연치 않게 이 작품을 들여다보던 시간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 당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주제로 작품을 분석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강의 시간 내내 학생 전체를 난감함의 끝으로 몰아가던 여 교수의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난다. 그 순간 교수는 범인의 행동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왜 범인이 그런 범죄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런 의미의 질문들이 쏟아졌던 것이었을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야기가 언급되면서, 비로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던 질문의 변곡점이 시작되는 순간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는 범인을 중심으로 분석했던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동일 작품을 마주하고, 범인이 아닌 클라리스 스탈링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고 싶은 새로운 욕심에 허덕이고 있다. 또 한 사람. 한니발 렉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인물 렉터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역시 망가진 신이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구부러지고 뒤틀려버린 신.

 


오이디푸스 콤플레스 혹은 성적 도착증에서의 성적 가학이나 물품 음란증?(네이버 참조)이 이 소설이 다루고자 하는 것의 다는 아닐 것이다. 망가진 신이 들여다보기 원하는 개인의 상처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 그러한 개인의 욕구와 열정이, 현재에 어떻게 반영되어가는 가에 대한 것들가지 더불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은 순간이다.

 


양들의 침묵은 일시적인 것이다, 라고 했던 렉터 박사의 말은 이를테면 이 작품이 연작이 될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작가는 그 뒤로 작품을 더 냈다. 그러나 스탈링이라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작품 안에서 그녀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다가온다는 생각도 든다.

 


쓰다보니 정신이 없다. 마구잡이로 늘어놓기만 하니 주워담을 기운이 소진된 듯하다. 이제 그만 마무리를 해야 한다. 오랜만에 몰입할 수 있었던 책이라 반가웠던가보다. 또 오랜만에 색색들이 포스트잇까지 붙여가며 정성들여 읽었던 책이라 애착이 꽤 갈 듯도 싶다.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서 줄인다. 일절만 하자. 길어지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나이 탓이겠지만 그런건 기꺼이 받아들일 일이다.

 

 

 

 

 

 

 

The Silence Of The La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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