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이 소란하지 않은 계절 현대시학 시인선 107
이경선 지음 / 현대시학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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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이 소란하지 않은 계절

 


현대시학시인선 이경선의 시집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접했다. 누군가는 시 읽기 좋은 계절을 일컬어 가을을 이야기하지만, 겨울도 시 읽기에 참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눈이 내렸다. 그냥 내린 게 아니고 많이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한파라는 말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가 싶다. 몹시 춥다.

기말고사 기간 중인 아들은 시험을 망치고 연이어 한숨만 내쉰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녀석이 만들어낸 하루의 기분을 알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책이나 봐야지 싶다. 그런데 책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감정은 이렇게 전염성이 큰가보다.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것들이 꿈틀거린다. 시집을 읽고나면 생각이 참 많아진다. 시를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질문이 잘못됐나?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었다. 이 젊은 시인의 시를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따뜻함과 보드라움. 여리고 아리고 아련함이었을까.

시집 말미에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의 해설까지 꼼꼼히 읽었다. 그는 아마도 이 시인이 짓고 있는 그만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기억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억이라…….

 


그런데 말이다. 실은 해설에 담긴 이야기를 이해하면서도 온전히 그렇구나, 라고 받아내기가 싫었던가보다. 이건 또 무슨 꽁하게 못난 심술보인가.

해설은 그저 시집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살짝 참고만 하면 좋은 어떤 것이라고 해두자. 시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읽는 이마다 다르다. 그러니 연연해하지는 말자.

각자가 시를 이해하는 영역과 정도가 다르다고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그냥 내가(각자가)가진 경험과, 내가 가진 철학과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그런 나의 고유한 성향으로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시집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있으며 꽃, 가을, , 여름의 부재가 달렸다. 각각의 장에서 눈에 드는 시들과 마음에 드는 표현들이 꽤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2부 가을에 실린 시들이 계속 마음에 들어왔던 것을 기억한다.

시인의 이야기 안에는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이따금 누이가 등장하고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따뜻한 관심과 정()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득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담겼던 시인 기형도의 시가 생각나더라) , 그리고 하늘과 별과 바람이 등장한다. 장터와 골목과 주차장과 빗자루도 보인다. 그렇게 시인의 시선이 잠시 머물다 간, 세상의 모든 장소와 순간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순간순간에 시인은 그만의 따뜻하고 여린 눈길로 바라보이는 세상을 끌어안았던가. 그렇게 시를 지었나보다.

 



소란하지 않은 소란. 제목과 시에서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어찌보면 모순이고 또 역설 같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나 또한 이 표현의 어그러짐이 가져오는 의미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웅장하지 않아도 좋다. 화려한 수식어가 없어도 좋다. 따뜻한 시를 좋아한다. 암울함으로 그친 것 같지만 실은 그 안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시를 가슴에 담아두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그 울림을 그런 시들을 찾는다.

 



-건너편 미소 짓던 / 까만 머리칼 곱디곱던/ 젊은 날의 여인 머무는 곳//

한 생에 사무칠 적/ 그날엔 채 알지 못하여서/ 볕 따라 맑을 뿐이었더라//

마음밭 한편엔 고것이 어려/ 메마른 삶에 한 줌의 생명 되었더니//

생명과 사랑 나의 먼 고향/ 노니는 산록을 본다//

<시절의 산록 중. 일부인용>P33

 

 

 

멀리 눈 감은 하늘/ 다시 흰 눈이 푹푹 나린다//

순백의 거리에서/ 눈송이 하나 집어도 본다/ 보드란 것이 곱기도 하다//

저 여인도 곱다/ 까만 머리칼 찰랑이고/ 하얀 얼굴엔 빗금 한 점 없다//

너머의 눈발은 오늘도/ 오늘도 날리고/ 나는 계절을 걷고 있다//

<남산 놀이터 중 일부 인용>P55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덜컹이는 소리가 더는 아프지 않다/

여인의 구두굽도 멀리 동그라니/ 아물 것도 같다//

찰나의 빗살에도 새 계절이 왔다/ 꽃씨는 절벽에도 제 삶을 피웠다//

<꽃씨는 절벽에도 제 삶을 피웠다 중 일부 인용>P113

  

 


감정일랑은 강요해서는 안 될 것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적어놓고 보니 그 짓을 내가 또 하고 있다. 이렇게 저질러놓고 반성하는 나는 기실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 좋아하는 구절을 다 적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는 중이다. 나는 무엇을 찾고 싶은 것일까. 나는 시인의 시에서 무엇을 찾아낸 것일까.

 


마지막으로 묘하게 마음을 끌던 시의 전문을 옮긴다.


 

 

각자의 사정


 

사월의 벚꽃은 지천에 흐드러지다,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같은 날의 매화, 지천으로 피우길 바랐으나

저 자태 함부로 뽐내지 아니하였다

 


은행나무는 가로수가 되길 원치 않았으나

시월의 가로수엔 완숙한 은행이 한창이렷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다


 

기관지성 천식을 앓던 사내

숨이 가빠

마스크를 쉬이 쓰지 못하였고

 


자식 여럿 이고 살던 사내는

저 초가삼간 못 가

객이 없어도 문을 닫지 못하였다

 


열시가 넘어 거리엔 사람이 많다

어디로 갈까, 아직 불 켜진 여관으로

혹은 낯선 밤으로

갈 곳 없어 헤매는 이 많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다 <각자의 사정 전문인용>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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