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책장파먹기 9-10]



이번 시즌 책장 파먹기의 마지막 책이다. 작가 이청준의 눈길’.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아 가장 만만할 것 같았는데 다시보니 가장 묵직한 책을 마지막에 남겨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묵직함으로 다가오는 무게감이라니.

꽤 오래전이다. 이십 대 초반쯤이었을까. 아직 남자친구도 없었고, 데이트라는 것도 할 줄 몰랐던 시절. 늦은 저녁 거실 소파에 엎드려 이 책을 보던 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 때 곁에서 내 엄마가 했던 말이 먼 시간 속에서 잔잔하게 걸어나오는 것만 같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아내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으며 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눈길을 다시 읽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가슴을 훑는다. 코가 찡끗하게 울리는 걸 느끼면서 어느새 철없던 청춘의 시선에서, 한참은 늙어버린 중년의 시선으로 옮겨온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라는 자리는 원래 그런 것일까? 태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일까? 인연 중의 가장 거룩하고 또 가장 잔인한 인연이 어머니와 자식의 인연이 아닐까. 생각들이 이어진다.

 


소설 눈길에는 어머니와 아들과 아들의 부인이 등장한다. 도시의 분주함과 시끌벅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의 적막함. 어쩌면 의도된 침묵이다. 그렇게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인물의 내적 갈등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형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남은 건 작은 초가집 한 채. 형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는 주인공 나는, 피해의식 속에서 형과 어머니에게 진 빚 따위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왔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소설은 하나의 계기로 인해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 외면한 채 숨겨놓은 어머니와 아들의 빚을 어쩔 수 없이 꺼내고 마주하게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낡은 기억을 가져오면 단지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밥을 해줬다는 것. 눈길을 둘이 같이 걸었다는 기억뿐이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너무나 작은 부분만을 여태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과하게 끌어안고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남의 손에 넘어간 집이었을망정 주눅 들고 위축되었을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주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 그 마음을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야 완연하게 알 것도 같더란 말이다. 그냥 단지 문장으로 안다, 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작가의 감정. 그 감정이 불러오는 삶의 회한까지 이제야 다 알 것도 같더란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여기 현실에서 낙오가 된 모자가 있다. 아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동도 트기 전에 눈길을 헤치고 고향 집을 벗어나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떻게보면 어머니는 삶의 희망인 아들을 어두운 현실에서부터 도피시킨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홀로 남겨져 암울한 현실에 남겨진 가녀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어머니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잿빛 우울함 안에서도 따스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동네에선 집집마다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서라도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져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자고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p 117

아들과 함께 걸어온 발자국이 찍힌 눈길을 어머니는 홀로 되돌아간다. 눈길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이다. 그리고도 또 모든 것을 받아주고 덮어주는 어머니의 모정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담이다. 이틀 전 먼 집안 어른이 소천하셨다. 생과 사는 늘 멀리 있지 아니하거늘. 삶은 늘 사는 것과 죽는 것을 함께 이고 이어진다. 그래서 더 두렵고 간절하다.

삶 속에서 어머니의 자리, 부모의 자리는 어떠한지. 자식의 자리에서 느끼는 무게감은 또 어떠한지. 함께 느끼고 공감하지만 겉으로 드러내 표현할 수 없는 속 깊은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우리 모두의 존재감을 힘들게 하는지를 생각한다.

결코 살면서 빚지지 않은 이는 없지 않은가. 엄마, 아니 어머니의 몸을 통해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아픈 빚을 지고 살아간다.


 

소설 속 화자 또한 그러하고 소설을 읽는 나도 그러하고 모두가 다 비슷하지 않은가말이다. 그놈의 삶의 빚. . ..... 빚이 더 큰 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받아내고 살아가는 방법을 또 이렇게 배우며 사는가 싶다.


 

가지고 있는 책은 19971판을 냈으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작가 이청준에 대한 추억을 다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문체에 익숙하고, 그의 문장을 사랑한다. 이렇게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젊은 작가들에게서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사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해서 드는 자괴감 같은 하소연일 수도 있다. 소설 눈길은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이다. 책에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함께 실렸다. 조근조금 나지막하게 풀어가는 작가 이청준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책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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