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작은 땅의 야수들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p 512

 


하필이면 왜 나는 이 사람 이토의 말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까. 일본인이었으며 인간으로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두기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개인의 욕망을 쫒으려는 이 사람의 말이 왜 내게 긴 여운으로 남았던 것일까.

 


숨겨진 진실을 찾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라, 라는 문구 때문일까. 인생이란, 삶이란 시간이 흘러가는 그대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던가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일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 강점기, 중일전쟁, 해방기, 한국전쟁, 그리고 6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충돌과 함께 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소용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더라. 역사적 충돌이나 역사적 소용돌이나 어쨌든 가슴 아프고 쓰라리고 애잔한 순간임에는 분명하다. 지나간 우리의 역사가 그러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감당해야만 하는 무게는 막중하다. 한편으로 그 무게가 여전히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수선한 오늘의 시대를 두고 미래에 어느 시점에서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이들은 어떤 시선으로 비판하게 될까. 생각이 샛길로 빠지기 시작한다. 쓰고보니 어쩐지 어색하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작가 김주혜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미국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어른들께 전해들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이 이번 소설의 모티브 역할을 했다는 소개글을 읽는다. 그런가하면 역자 박소현에 대해서도 한번은 생각해봐도 좋겠다. 이번 소설이 한글이 아닌 영어권 언어로 창작되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소설이 원래 한글로 창작되었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상을 받을 정도로, 역자 박소현의 번역이 안정적이고 유려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언어는 언어가 속한 그 문화를 대변하기도 한다. 다양한 문화의 차이를 언어가 얼마나 극복하고, 아니 재창조할 수 있을까. 영어가 아닌 한국어가 담아내고 있는 많은 색채들. 많은 의미와 상징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말미에 역자의 이야기 중에 인물들의 한국어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원래는 영어 이름이었는데 이를 역자 박소현이 옥희, 연화, 월향, 은실 등.. 옛스런 친근함이 담긴 이름으로 재창조했다는 이야기들이다. 어찌보면 잘 들어맞은 궁합이 아닌가. 저자 김주혜의 원작과 역자 박소현의 번역이 일궈낸 하나의 작품은 이토록 좋은 궁합의 결실이 아닌가싶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여러 가지 것들을 소급했었다. 이건 일종의 고백이다. 뭐랄까. 내가 살아오면서 봤던 것들, 들었던 것들, 생각했던 것들, 기억하는 것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곤 했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것들을 자주 불러 모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포수에 대한 대목에서는 일제 강점기 사라져갔다던 한국호랑이를 생각했었다. 그와 동시에 영화 한 편을 생각하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때로는 한 시절 뜨겁게 열을 올려 찾아보던 드라마를 떠올리기도 했었던 것 같다.

어쩐지 모르게 염상섭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고, 채만식의 소설 분위기가 연상되다가 소설가 이상이나 나혜석, 조선 말기 명월관의 기생들과 김두한, 모기업 회장까지 여러 인물이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딴은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딴은 자연스러운 이치 같기도 하다. 그만큼 소설이 끌어안는 스토리의 전개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어지다보니, 그 안에서 접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서는 까닭이 아닐까.

 


인물들의 연관성이라고 해야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질긴 인연이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남녀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 여인들. 어머니와 딸.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인연의 긴 끈들을 작가 김주혜는 참 노련하게도 직조해내고 있지 않은가.


 

조심스레 결론을 내려볼 수 있을까. 이번 작품은 우리가 뼈아프게 겪어내야만 했던 시대의 아픔이,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지난한 삶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는 소설이다. 역사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 속에 엉키어 들어오는지를 강한 인상으로 펼쳐 보여주는 듯하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p603

 


기억하고 싶은 글을 마지막에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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