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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그 시절. 그리고 지금.
종일 윗층에서 드릴 소리가 이어지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이 소란을 집에서 고스란히 인내해야만 하는 걸까. 거실과 부엌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드릴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땅을 파는 듯한 드릴 소리와 알루미늄 같은 재질에 못을 박는 듯한 드릴 소리, 망치 소리가 함께 들리지만 자세히 듣고 있으면 소리의 개념이 다르다. 이 난잡한 소음의 차별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에쿠니 가오리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집중하기 어렵다. 소음의 한 가운데에 난폭하게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이렇게 내가 원하고 듣고 싶은 나만의 소리를 찾으려는 개인의 불편한 의지에 대해 생각한다. 혼란스러움이다. 아니, 아니다. 이것은 내가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으면서 동시에 아주 오래전에 그녀의 작품집(수박향기)을 접했던 기억을 소급한다. 지금도 여전히 감각적이고도 묘한 매력에 끌렸던 글들이었음을 기억하는 중이다. 십 년 전 나는 삼십 대 후반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의 시선으로, 그때 그날 남겼던 기록에 썼던 표현대로 야살스럽다,라는 표현이 적절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십 년 후, 지금 나는 다시 에쿠니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도 설레고 떨린다.
작품 속 배경은 여자 고등학교다. 주인공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같은 반 동급생들 여러 명이 모두 주인공의 배역을 맡아 분주히 열연하는 듯한 형식을 갖췄다. 작가는 어느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한 명의 인물을 이야기하고, 그 인물의 친구를 또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각각의 인물마다 처한 환경 및 심리상태와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해부하듯 자세히 혹은 상징적인 이미지로 강렬하게 드러낸다.
풋풋하면서도 아릿하게 아픈 수많은 감정과 함께, 대범하면서도 조급함을 품은 미성숙의 거친 감정들이 작품 안에서 뒤엉켜 부유한다. 마치 창문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난반사되는 햇빛의 시린 빛무리처럼 어여쁘다. 그러나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과 눈은 아리다.
왜 이렇게도 흔들려야 하는 걸까. 그러나 흔들리면서 성장해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않은가. 삼십여 년 전 내 모습과, 사춘기라는 긴 풍랑 속에서 오늘도 여전히 위태로운 승선을 외치는 내 어린 딸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교차 되는 건 왜인지 모른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기쿠코다. 미약하고 아픈 엄마를 대신해 장을 보면서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사는 아빠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관계를 조율하던 아이는 정형화된 인식에서 벗어난 그 어떤 일에(동성애) 설레는 인물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고독을 선택하겠다며 자신의 외로움을 투영하는 존재인 ‘초록 고양이’를 언급하던 에미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상처를 끌어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친구로 인해 상처받고 혼자가 되며 홀로 남겨진 모에는 고독 속에서 강해져간다. 막 이성에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인물로 등장하는 유즈. 외부의 편견에 대항할 수 있는 강한 힘을 내면에 품고 살아가는 카나와 유코. 그리고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미요까지. 이들은 모두 흔들리는 존재인 동시에 스스로 뜨겁게 발하는 강한 에너지를 품은 인물들이다.
시절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진다. 과거 어느 시절에 어쩌면 우리 모두가 흔들리며 통과했던 순간의 터널을 기억하면서 현재 혹은 미래의 어느 시기까지 다시 이어질 긴 터널의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그저 평범하면서도 나약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나의 모습이고 내 딸의 모습이다.
애틋하고 아련하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