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삶과 작품세계
조주희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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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생 반세기

하루키의 삶과 작품세계

 


무라카미 하루키 평전이다. 한 사람의 삶이 그려내는 여정과 함께 그의 작품이 줄거리 요약 형식으로 실렸다. 개인적으로는 하루키라는 작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개인적인 관심사는 주로 외국 소설이 아닌 한국 문단에 속했던 작품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 시절 역시 하루키라는 작가가 유명세를 타고 있었을텐데, 나는 거의 이 사람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던 것같다.

내가 처음 접했던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일본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소설 상실의 시대였다. 지금은 상실의 시대가 아닌 노르웨이 숲으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작품이다.

 


오래된 시간만큼이나 기억이 성실하지 못해서 잘 기억난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아련한 느낌이란 건 아직 남아 있다. 방황하는 청춘.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였을까. 혹자는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어서 그의 작품들이라면 빠지지 않고 다 읽고 챙겼다는 이야기도 들려오는데, 나는 왠지 기가 죽을 것 같은 소심증이 도진다. 움츠러드는건 소심증에서 발현되는 자격지심인가.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그의 평전이 읽고 싶었다. 작품을 먼저 읽고 분석하는 일이 먼저일지, 평전을 먼저 보는 게 먼저일지를 잠시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는 작품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권하는 편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작품을 먼저 읽고 스스로 판단하고 분석해보는 일이 중요하지만 먼저 작가의 평전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어떤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평전 자체만으로 봤을 때 글이 풍기는 분위기는 무게감이나 건조함 없이 부드럽고 빠르게 잘 읽히는 장점이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책의 분위기를 떠나 작가에게 초점을 맞춰볼 일이다. 작가는 백 년 전 이백 년 전 작가가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 존재한다. 뭐랄까. 일종의 개인적인 생각이긴한데, 하루키라는 작가와 개인인 내가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상황이,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느 소설가의 여러분과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여러 가지로 매우 중요한 겁니다고 했던 말이 주는 의미처럼 말이다.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꽤나 많은 부분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말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개개인마다 생각하고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경험치의 정도는 서로 다르고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여전히 묘한 연대감을 형성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작부터 그의 글쓰기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어쩌면 그만의 독특함과 다름이 시대를 뛰어넘기도 하고 딴은 다른 세계와 세대를 이어주기도 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루키에게 처음 상을 안겨준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당시의 심사위원들의 선평에도 일정부분 작가만의 독특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한 호감도는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호불호에 대한 정도는, 리얼리즘 문학이 자리를 잡고 있던 일본 문학의 만연한 풍토에 낯선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전에서는 그 낯선 바람의 인식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묶인 일종의 꼬리표로 자리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듯했다.

 


작가 하루키는 1949 출생했다. 일본의 패망과 한국전쟁 발발하기 전 사이에 태어난 세대다. 그의 출생은 아니 출생시기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전쟁과 그로 인한 피폐해진 인간 존재감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외면할 수 없었던 시기는 아니었을까. 작가 역시 그 점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에게 있어 전쟁과 인간존재를 떠올리는 순간마다 연상되는 존재는 당연 그의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평전에서 소개되고 있는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전쟁 일화와 함께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작가로서 하루키가 풀어내야하는 스스로의 문학적 화두의 한 가지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사견이다)

그는 일본군으로 참전한 가해자의 모습인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태평양 전쟁에 대한 본국의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일본의 민낯에 대하여 그의 소설에서, 에세이를 통에서, 강연장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까지 노벨 문학상을 운운하며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일본이, 하루키의 반일에 가까운 행보에 반감을 숨기지 않는 모습은 시종 이중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문학은 문학이 만들어놓은 세계와 틀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늘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가 싶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책 앞부분에서는 주로 작가로서 살아온 이야기와 작품을 쓰게 된 동기 내지는 과정에 관련한 비하인드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본국을 벗어나 멀리 이국으로 떠나며 자신의 존재감에 몰입하기를 원했던 그의 행적은, 그의 소설만큼이나 한곳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글쎄다. 딴은 모든 작가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어느길이든 떠나야 한다는 조건은 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때때로 떠나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는 주저함 없이 떠나야 하는 것도 좋아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하루키에게 있어 이국으로 출발했던 일과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작가에게 일종의 성장통과도 같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단단하게 응집되어가는 작가로서의 고뇌가 성장통 안에 녹아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많은 부분을 차치하고 작품에 대한 언급은 조심스럽다. 완벽하게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나면 조금씩 그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우선 빌려온 그의 단편집부터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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