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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각본집 - 용기를 내는 게 당연한 나이
임선애 지음 / 소시민워크 / 2020년 12월
평점 :
69세
-그래서 아름답다.
영화 69세의 각본집이다. 내게는 각본집이라는 표현보다 극본집 내지는 희곡집이란 표현이 더 익숙한듯하다. 어쨌든 다 비슷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대략 두 가지 정도다. 우선은 각본집에 대한 이야기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나눠봐야 할 것 같다.
아쉽게도 나는 이 영화를 직접 보지 못했다. 그렇긴한데 책의 구성상 각본집과 더불어 영화 속 장면과 스토리보드까지 곁들여 싣고 있기 때문에, 굳이 영화를 직접 보지 않았다고하더라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는 없어보인다.
이 작품은 임선애라는 여성에 의해 먼저 글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영화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작품이다. 그녀는 감독이자 작가로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읽으면서 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자. 우선 쳐지는 감 없이 명료하면서 동시에 속도감이 느껴지는 빠른 스토리의 흐름이, 개인적으로는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각본집이 서사와 산문 위주의 소설과는 다른 분야이고, 그런 까닭에 서로 다른 형식에서 나오는 나름의 독특한 메리트가 있음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차치하고 읽는다고해도, 이번 각본집은 자칫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범주까지 객관적 시선이 오롯하게 잘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가 싶다. 때문에 인물의 심리묘사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선은 질척이지 않으면서도 진지하다. 더불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주제와의 연결성과 강조점은 과하지 않으면서 허투루 보이지 않게 다가온다.
작품은 젊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69세의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실 이 작품은 여성과 성폭행이라는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이야기로 우리의 시선을 가장 먼저 붙잡는가 싶다. 그만큼 무거운 주제와 소재를 선택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가하면 조금 더 나아가 작품이 시사하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사람들의 의해 고착화된 편견과 사회적 인식과의 과감한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인공 효정은 성폭행을 당한 것을 숨기지 않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신분으로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그녀에게 쏟아지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치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와 불편한 의심을 받기도 하고, 몸 조심을 하지 그랬냐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상처받기도 한다. 거짓말 탐지기 검사 역시 고소인(피해자)에게 유리하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를 더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법조계의 판단과 편견과 모순 속에서,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 효정의 모습은 사회적 약자의 어두운 민낯을 보는 듯 씁쓸함을 자아낸다.
고형사와 나누는 대화 중 “젊은 여자였으면 그 사람이 구속이 됐을까요....?” 라는 효정의 대사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젊다는 것과 나이 든다는 것이 무슨 기준이 되는지. 나이가 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지.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각설하고 주인공 효정의 마지막 결정은 무척이나 건강?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게 결론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족 아닌 사족이라고 한다면 효정과 동거인으로 등장하는 동인의 주변에서 등장하는 세대간의 갈등을 안팎으로 깊이 깔고 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세대간의 갈등은 기본으로 본다고해도 노령화 시대, 여성 노인 인구의 성폭력 피해 증가에 대한 사회적 이슈라든지 그런 부분을 가져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은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하나의 작품이 한가지 이야기로만 갈 수는 없으니 단단한 뼈대 위에 근육도 붙이고, 인대도 붙이고, 피부도 올리는게 정석이다. 작품에서는 각각의 인물이 그려내는 저마다의 상처를 지닌 가족의 이야기가 눈에 보인다. 이에 대해 해결책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등장 인물의 선택에 맡기는 듯하다.
다만, 가해자로 등장하는 이중호와 이 인물을 둘러싼 제 3의 구성원들의 선택은 좀 묘하다. 이 또한 인물들의 선택에 맡기는 게 정답이기는 한데, 그 결말이 사뭇 의아스럽고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p119
마지막으로 스크린이 아닌 책으로, 책 속에 사진으로, 만나는 효정을 연기한 배우 예수정에 대해 생각한다. 먹먹할 정도로 깊은 그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수많은 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눈빛과 그녀의 표정이, 효정의 이야기를 대신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예수정)으로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듯하다는 말을 남긴다.
삶은 매 순간 진지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