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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실타래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11월
평점 :
파란 실타래
가족이란.
책은 일 년쯤 전에 동네에 새로 생긴 중고서적에서 남편이 무심코 골라준 책이었다. 그는 아내의 관심분야가 단순히 소설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했던가보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가끔 무슨 안목이 발동해서였는지 그가 가뭄에 콩 나듯 내게 책을 선물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는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일 년에서 오육 년의 시간을 묵힌다. 그 사이 잘 익은 된장 항아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포근포근한 시간이 지나간다. 더 이상 꽂을 곳도 없이 빼곡하기만 한 책장 어딘가에서 푹푹 익어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잘 숙성된? 책들은 몇 배로 짙어진 농도 짙은 감동을 선물하곤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곤 한다.
앤 타일러의 ‘파란 실타래’는 가족 이야기다. 누구나 가족은 존재한다. 만약 내가 속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미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울해하지는 말자. 나라는 사람을 낳아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마져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 치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일까.
감사하게도 작가 앤 타일러는 가족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각각의 구성원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미묘한 심리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위로의 말로 이들을 가슴깊이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구심점으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건 매우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바로 이들이 나고 성장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장소적 배경인 ‘집’과, 각 세대를 끌어가며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자리에서 헌신했던 ‘여자,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던 여인들을 꼽았다.
책 속에 주인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가족구성원들은 모두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다. 그저 간단하게 기회균등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인만큼 주인공은 가족 모두가 되는 셈이니 말이다.
소설은 애비와 레드 휘트생크가 연락이 소원한 아들 데니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애비와 레드의 부부이야기와 그들의 아이들(아만다, 지니, 데니, 스템)의 대한 이야기, 그리고 레드 휘트생크의 부모세대인 리니와 주니어 휘트생크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부모세대가 어떻게 만났으며 어떻게 사랑을 알게 되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이도 별로 없으며, 알려줄 사람도 그다지 없어 보이는 삶이 특별하게도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저마다 자신이 속한 시간 속에서 분주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편적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주 먼 시간 저편에 있었던 부모세대의 삶의 모습들이 사실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 그 가운데서도 빛나는 희망과 지난한 삶의 고충. 곤고함은 늘 우리들을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가슴 한편으로 뭉클함이 생겨나게 된다. 그들에게도 그들의 어머니가 있었고, 아버지가 있었으며, 서로 의지하고 미워하며 사랑했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다가가려 노력했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니어 휘트생크가 그렇게 고집했던 그 집. 자신이 직접 지었지만 다른 이들이 살게 된 그 집을 주니어는 끝내 자신의 집으로 사들이게 된다. 그의 아들 레드가 그 집을 물려받게 되면서 2대에 걸쳐 휘트생크가의 이야기가 이 집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다.
새로 사들인 집에 파란 색의 그네를 갖고 싶었던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였던 리니(그러나 남편 주니어의 생각은 달랐다). 파란 실타래로 남편의 셔츠를 지어주던 또다른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애비.
책 후편에 실린 역자 공경희의 해설에 따르면 파란 실타래는 관계와 관계 그리고 세대를 이어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경희의 해설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작품 속 애비는 치매 증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감으로 더욱 힘들어지는 가족관계를 염려하는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안에서 애비는 가족들이 서로 단단하게 관계를 붙들고 갈 수 있는 방안과 지혜를 선사하고 떠난다. 관계를 이어주고 세대를 이어주는 파란 실타래는, 어쩌면 수많은 삶의 질곡 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면서 극복해갈 수 있는 지혜를 전해주는 위로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삶을 바라보며 경험하면서 동시에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밝고 뚜렷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은 가족 구성원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여성. 즉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며느리라는 자리에 서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흔들리는 듯 연약해 보이지만 결국 중심을 잘 지켜내고 있으며, 가족을 지켜내려 보일 듯 말 듯 자신의 자리에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족 모두가 스스로의 자리에서 아등바등 삶과 힘겨운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도,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며느리의 자리에 선 이들은 가족을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면모를 보인다. 아. 그러나 제발 페미니즘 시각에 갇혀 담론을 이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미니즘 보다는 그저 어머니라는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어머니 애비가 떠난 빈자리에서 늘 가족들 주변에서 겉돌기만 했던 이방인이었던 데니는 진정한 의미의 가족애와 용기를 되찾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이와는 반대로 생모에 대한 기억과 상처로 집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존재인 스템이 도리어 집을 벗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데니의 모습과 상반된다. 그러나 스템 역시 결국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현명한 아내인 노라가 그의 곁에 있으니까.
소설은 깊은 수심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진한 바다의 이미지를 닮았다. 속을 알 수 없이 그저 파란 색의 출렁이는 물빛만 반사되지만, 우리는 바다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느낌으로 알아간다. 그리고 바다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파란 실타래는 개개인의 측면에서 보는 이야기와 함께 이들이 가족의 이름으로 함께 있을 때의 서로가 얽힐 수밖에 없는, 다듬어지지 않아 드러나는 거칠고 투박한 무엇들까지 모두모아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느린 듯 속도감이 있고, 나른한 듯 하면서 감동이 전해지는 묘한 책이다.
혹 누군가 이 책을 읽는다면 세상에 왜 아버지가 존재하고, 어머니가 존재하며 또 그들의 자녀가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