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누었던 순간들
장자자 지음, 정세경 옮김 / 도도(도서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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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누었던 순간들

-청명한 순간들. 삶과 사람들

 

어제는 지치도록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해가 난다. 그럴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어제 이른 저녁 무렵 비가 그치고 하늘에 쌍무지개가 뜬걸 보고나서 곧 비가 그칠 것을 예상했다. 문득 기억에 가물가물한 성경 한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지개가 뜨면 비가 내리지 않을거라는....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달랐다. 무지개 뜬걸 보고나서 집을 나섰는데 여전히 비는 내렸다.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조차도 우리에게는 모두 소중한 과거로 자리하게 된다는 생각은 딴은 거창할 것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조금은 속 깊어보이는 표현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게도 그러한 한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소주 한잔 따라놓고 소주잔에 맺히는 작은 물방울이 잔을 타고 슬그머니 내려가는 걸 보면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일까. 왜 소주잔을 완전히 비우고나면 머리위로 잔을 거꾸로 탈탈 터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 알콜에 취해 발그레진 얼굴을 보면서 붉어진 얼굴이 혈색 있어 더 좋다, 했던 누군가는 아직 잘 살고 있으려나.

 

중국 작가 장자자의 소설 ‘우리가 나누었던 순간들’은 온도로 치자면 뜨겁지 않으면서도 차갑지 않은 적당한 온기로 포근하다. 색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강렬한 형광빛이나 보색 차원이 아닌 부드러운 파스텔을 연상시킨다. 에피소드 하나하나 뜯어서 들여다보자면 크게 특별하거나 상징적인 이미지는 없어보이지만 그냥 그대로 어여쁘다.

문득 내가 이런류의 소설을 좋아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갑자기 장자자의 책을 필사노트에 옮겨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문장이고, 문장을 이어가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이 많은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사람 사는 건 매한가지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자는 부자들끼리 행복하게, 가난한 이들은 가난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미와 그 와중에도 찾아볼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으로 함께 주어진 삶을 살아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에는 늘상 여자가 있고 남자가 등장한다. 그 둘 사이에는 애정의 진실한 사랑이 있으며, 혹은 애증의 불온한 사랑이 양념처럼 들어간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삶을 마무리하며, 상처를 주고 다시 받기도 하고, 아이는 청년으로 성장하고, 어른은 노인으로 늙어간다. 그게 삶이다.

 

‘우리가 나누었던 순간들’은 소박하면서 가슴 찡하게 맑은 울림이 있다. 더욱이 살짝살짝 유쾌함과 위트를 가미한 작가의 이야기는 독자의 가슴을 조용히 두드린다. 심각한 스토리에 지친 뇌신경 세포들을 위해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한다면 장자자의 소설을 권한다.

답답한 일과 시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복숭아나무 아래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친구삼아 달짝지근한 단술에 입술을 적시며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읽어보면 괜찮을 책이 아닌가 싶다.

잠깐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적어보자. 어려서 어머니를 멀리 타지로 떠나보낸 소년 류스산은 시골 작은 동네 윈벤진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날 소년 앞에 나타난 소녀 청샹. 이들의 유년시절은 작가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시킨다. 얌전하고 말없이 착해보였던 소녀 청샹은 시골 아이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을 시작하고, 류스산은 매번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뇌물로 바친다.

대학생이 된 이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또다른 시간을 보내는데 스산은 좋아하는 여인에게 이별을 통고 받고, 비루한 시간들이 그를 에워싼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집도 없고 가난한 청춘이 좌절의 바닥에 술병과 함께 온몸으로 뒹구는 장면은, 중경삼림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유통기한이 지난 오래된 통조림을 뜯어 먹던 남자 주인공. 어두운 화면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우울해하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할머니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스산은 청샹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어린 사기꾼으로 등장하는 치우치우와 함께 보험설계 사업에 몰입한다. 도회지에서 그 스스로를 그토록 좌절시켰던 갑의 행포는, 사랑의 연적으로 등장하는 승자의 정신적 폭행과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불합리에서부터 벗어나 당당하게 이겨내기 위해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유일한 존재의 고향에 정착하게 된다.

 

얄미운 이에게는 한번쯤 눈을 흘겨도 된다. 못된 짓 하는 찌질한 사람한테는 평생 한번쯤 후회하지 않을만큼 복수해도 좋겠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류스산 옆에서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주던 여자 청샹과 치우치우와 외할머니는, 오래시절 그에게 좌절감과 낭패감을 남기고 떠난 어머니의 부재를 극복하고 진정한 어른이 되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조력자의 역할로 그려진다.

즈거를 비롯해 니우따텐과 친샤오전, 마오팅팅과 그녀의 남동생 마오즈지에를 비롯한 다양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애잔하면서도 곰살맞게 다가온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개 있나. 맛있는 요리 먹으면서 행복해지는 시간에는 그냥 그렇게 웃으면서 행복해지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듯 장자자의 이야기는 부드럽다.

 

실은 결말이 좀 아쉽기는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온전히 작가의 의도가 짙은 책이다. 거기에 동참할 수 있다면 좋겠고, 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듯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참 예쁜 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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