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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년 가게
이인우 지음 / 꼼지락 / 2019년 1월
평점 :
서울 백년 가게
-어여쁘고도 견고한, 그 무게감.
옛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시작됐다. 이 여행에서 숨은 그림을 누가누가 더 잘 찾아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어쩌면 카메라 한 대를 어깨에 비스듬히 둘러메고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길을 떠났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곳은 마치 과거로 떠나는 완행열차에 막 발을 올려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분위기다.
서울의 백년을 돌아보는 완행열차에 올라타면 신문사에서 몸담고 있다는 저자 이인우의 안내가 이어진다. 그의 목소리는 늘어지는 것 없으면서도 담백하고 매끄럽다.
목소리로 비유를 했지만 사실 이인우의 글쓰기가 무척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마디로 앞뒤 할 것 없이 문장이 깔끔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책 중간중간 인터뷰가 들어가고 사진이 들어가서 실제로 그 장소에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까지. 그와 함께 떠나는 서울 백년가게의 여행은 한편으로는 낭만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함과 애잔함이 물든 여정이기도했다.
책 속에서 그는 다양한 곳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재불문 장소불문이다. 다방, 여관, 다양한 음식점을 비롯해서 서점, 재즈클럽, 악기상가, 극장, 미용실까지.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세밀하게 서울 곳곳을 누비며 숨겨진 하나의 조각이라도 찾아 독자에게 보여주려 발품을 판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물론 그가 다니고 기억하는 곳을 다 소개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중 대표적인 곳만을 책으로 엮지 않았을까. 더 들어가고 더 살펴보면 서울에서 잠자고 있는 백년가게는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싶다.
일절하고 그런데 말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시간보다도 더 기나긴 시간을 같은 일을 이어가며 살아올 수 있었을까. 백이라는 숫자가 가져오는 무게감이 내게는 정말 거대한 바위가 내리누르는 압박감으로 느껴지더란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세월의 무게감은 보이지는 않지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책은 가는 곳마다 다양한 빛깔의 사연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래된 것이 주는 것은 향수이다. 그런데 사실 이 향수 뒤에는 기나긴 시간을 버텨낸 고된 삶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슬며시 꺼내놓더란 말이다. 그건 아마도 백년이라는 시간이 전해주는 어여쁘고도 견고한 무게감일지도 모른다.
이들 가게를 지켜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만의 긍지와 자존심과 같은 어떤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있어보였다. 그것이 그들이 대를 잇게 하고,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백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사회가 달라지고, 거리가 변하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는 시간동안 이들 ‘오랜것들(오래된 것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온 것은 당연하다. 어느 가게는 건물이 팔리거나 헐릴 위험을 넘겨 오늘까지 이어오기도 하고, 어느 가게는 그 변화를 이용해 옆 건물까지 확장해 번창해가는 적극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입맛을 따라 계속 연구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오래된 전통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가게도 있어보였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건 어디까지나 백년을 지켜낸 이들의 소신의 문제이다.
학교시절 늘 인사동을 돌아다니며 봤던 낙원악기상가의 커다란 간판이 생각난다. 그런가하면 잘 돌아가지 않는 뇌세포대신 기억력을 불러내는 사진 한장으로 내가 어쩌면 갔을법한
오래된 카페의 붉은 비로드? 천으로 싸인 쇼파를 생각해낸다. 한때 명동으로 매일같이 오고갔으면서도 어쩌면 나는 그 미용실을 단 한 번도 인지하지 못했을까. 덕수궁 정문 앞에서 상대에게 보기좋게 바람을 맞고 하염없이 혼자 걸어오면서도 딴 곳으로 튀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리숙한 오래된 내 모습이 겹쳐보인다.
이십대를 거쳐 삼십대를 정신없이 보내고 사십대 중반을 오늘 내 어깨에 이고 걸어가는 요즘이다. 어찌된 까닭인지 아날로그적 향수가 무척이나 그리운 시절임을 느낀다. 이쯤되면 새로운 기계 앞에서 아이들이 내게 기계치 소리를 퍼부어도 그냥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뭐 어때서. 나도 이만큼이나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남은 시간이 이제 막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고 위로 받고 싶어진다.
딴은 오래된 시간동안 세대가 서로 교류하고 이어져온 배려를 비단 내 집에서 무 자르듯 잘라낼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긴 겨울방학이 이어진다. 조만간 남매를 데리고 서울구경 한번 떠나봐야겠다는 욕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