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 남자네 집

-삶. 이야기의 힘

 

소설 ‘그 남자네 집’을 구입한 시기는 내가 갓 결혼을 하고 2여년이 지난 시기였던 것 같다. 날짜와 관련한 기록이 없다. 왜 날찌를 적어두지 않았을까. 대신 병원에 다니던 기록물이 책갈피처럼 끼워져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지는 않았다. 이 책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마도 그 시절에는 다른 작가의 다른 책이 더 위로가 되었던가 싶다. 아니면 나중을 위해 아껴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이가 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작가의 작품에서 풍겨져오는 분위기를 완전히 이해하고 맞장구를 칠만한 삶의 여유가 있을 때를 나는 기다렸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더 잘 된 일이 아닌가. 이십대에는 모르고 지나쳤을 책에 대한 감흥이, 나이 마흔 중반께 이르러 낯선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그건 아마도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제 혼자만의 치열함으로 씩씩거리던 우습지 않았던 열정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다시 작가의 소설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말한다. 어쩜 그리 재미나게 이야기를 잘 할 수가 있을까요?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기까지 작가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혹은 상상이든 글을 살찌우고 키우기 위한 바탕이 되는 이야기거리를 모으기 마련이다. 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이를테면 경험이다. 삶의 경험 같은 거 말이다. ‘그 남자네 집’을 읽다보면 삶의 경험이 얼마나 큰 힘으로, 강력한 지지대가 되어 작품을 받쳐주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주인공 나의 이야기는 실제 작가의 이야기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념의 갈등으로 가족은 부서지고 갈라진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 신산한 삶들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신께서 허락하신 이들이 있으니,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아들과 오라비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어머니, 우리들의 누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소설 속 나는 어머니와 혼자가 된 올케를 도와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미군부대 직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먼 친척뻘 되는 그 남자와 만남을 이어간다. 상이군인으로 제대하고 이북으로 떠난 형제와 아버지 대신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그 남자는 나를 누이, 라며 함께 청춘시절 남녀의 이성적인 관계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대감을 외면하고 안정된 직업이 가져오는 안정된 미래를 생각하며 은행직원과 결혼을 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진행된다. 현재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다시 회상부분인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는 형식이다. 과거 속에 그 남자는 반복적이고 편안한 나의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게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 그 남자네 집은 그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데, 집은 바로 집에서 살던 사람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나는 많은 것들이 변해버린 현재에서 과거의 옛 집을 찾아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추억을 불러낸다.

소설은 어떤 거대한 클라이막스 없이 잔잔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작가의 필력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고 강하지만 반면 한없이 부드러운 작가만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혹 하고 들어오는 특별하게 탐이 나는 비유나 은유적 표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한시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책을 읽는 이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소설 ‘그 남자네 집’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 같다. 마치 인간극장의 한 스토리를 보는 듯하다고 할까. 그래서 인간의 삶은 크게 특별나거나 거하게 웅장하거나 한없이 궁상이라 할지라도, 이 모든 걸 떠나서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갓 미물인 벌레 때문에 시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그 남자의 인생도, 홀어머니와 7남매의 장려라는 책임감으로 미군부대에 들어간 순진하기만 했던 춘희의 서글픈 인생도, 전쟁통에 아버지와 오라비를 잃은 상처와 이상과 현실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선택해 살아가는 주인공 나의 삶도 다 같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측은한 면모를 숨기고 있다. 그러나 숨은 상처의 크기를 떠나 이들 모두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 같다. 동화책 이야기도 하고, 내 어린시절 이야기도 해주고, 더 오래된 내 집안 어른들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나도 한국전쟁을 끼고 아이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광복이 공식적으로 공표되기도 전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일본군한테 쫒기다 뒤란에 사람만큼 큰 항아리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다던 내 외조부 이야기부터, 한국전쟁때 지붕을 뚫고 들어온 미사일에 눈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보며 눈이 멀었다던 외조모의 한서린 이야기까지. 그래서 외할머니는 그때부터 아들 절망구에 들렸다고 했었다.

어린시절 제일 먼저 외갓집 대문을 넘어 들어설 때마다 들여오던 소리..

‘막둥이 완!’. 내 아이들도 이제는 하도 들어서 그 막둥이 소리가 나올라치면 같이 따라 중얼거리는 것이다. 막둥이 완.... 구수한 이북 사투리를.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만의 힘을 지녔다고 믿고 살아왔고 아직도 변함이 없다.

소설 ‘그 남자네 집’은 이야기의 힘을 넘치도록 배불리 느껴볼 수 있었던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만큼 살아온 삶에 대한 애정과, 우둔하게도 잘 버티고 잘 참아왔다,라는 다독거림을 스스로에게, 혹은 나를 둘러싼 타인에게 조용히 말해주고도 싶은 욕심을 불러오는 글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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