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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활 1
인간이 바라보는 인간의 참모습에 대하여
선이 굵은 작품은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제 1권에 대한 정독을 끝냈다. 소설은 호흡이 길다. 그렇다고 해서 문장이 길게 늘어지지는 않는다. 번역물임에도 불구하고 번역된 문장에서 느껴지는 불편감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흐름이 길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은 책 읽기가 쉽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읽지도 못하는 책을 복잡한 심정과 불편한 시선으로 계속 째려보는 날이 많았다. 대작을 앞에 두고 엄살이 늘어졌다. 며칠 속도가 붙는듯하더니 또 느려졌다. 뭐랄까. 작은 항아리 안에 많은 것을 넣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1권을 읽었을 뿐인데 소설에서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찾아내고 말았다.
왜 이 사람,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고전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생각했었다. 작가에게 있어 부활은 짧으면 짧은 소설이고 길면 긴 소설이겠지만, 작품을 읽어내는 이들에게는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가 작품 안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숨가쁘게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책을 읽는 동안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물론 다수의 고전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지만 말이다. 부활은 농도가 더욱 짙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자주 떠올렸었다. 선과 악, 그리고 그 안에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모습들. 가난으로 인한 선한 사람들의 피폐함.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높은 곳에서 주체하는 신의 존재.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설 부활에서 함께 이야기해볼 만한 것은 번민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민하고 번민하는 인간의 나약한 내면에는 항상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생각은 당연한 일일까. 아니면 아이러니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해왔던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의 신분으로 갔던 한 법정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다시 조우하게 된다. 친모에게 버려진 채 양녀의 신분이지만 반은 하인처럼 살아온 그의 첫사랑 카튜사가 죄인의 신분으로 네흘류도프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아픈인연은 비뚤어지고 어두운 관계와 사회를 대표하는 듯하다.
과거 그녀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잘못과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카튜사에게 돈으로 보상을 하고 카튜사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가 법정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한편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 이후 가장 낮은 신분으로 추락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인물 카튜사는 자신을 희롱하는 남자들을 비난하면서도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이 무책임한 남자는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이 매정하게 외면했던 여인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내게는 좀 낯설고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선택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감옥에 있는 카튜사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그녀가 시베리아의 유형을 가게 되면 따라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다. 그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어쩌면 그의 이러한 행동이 그녀를 위한 일인지, 아니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속죄받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인지 모를 불분명한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은 늘 그의 선택을 힘들게 한다.
-분노로 얼굴빛을 바꾸면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당신은 나를 미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거죠?” 그녀는 마음속에서 일시에 솟구쳐오르는 모든 말을 단번에 뱉어버리려고 서두르면서 말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농락하고 저 세상에 가서는 나를 미끼로 구원받고 싶은 거죠? 아. 보기 싫어요! 그 안경도, 그 기름지고 밉살스러운 얼굴도, 가세요. 가버리세요!”- p291
카튜사는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온 그의 호의를 부정하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인물의 심리는 조금씩 변화를 가져온다. 믿지 않으면서 그를 원망하면서 그에 대한 카튜사의 마음이 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거부하면서도 다시 끌려가고 있다고 해야 맞는 것일까. 잊혀졌던 아니 잊고 싶었던 기억 속에서 불현 듯 나타난 사람. 자신을 농락해버리고 떠났으며 자신의 삶을 타락의 길로 떨어지게 했던 인물 네홀류도프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카튜사. 그리고 끊임없이 자아와의 싸움에서 선택하며 ‘이 선택은 옳은 일이다. 참된 선이다’, 라는 확신을 되새기며 그녀를 위해 나아가는 인물 네홀류도프의 번민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책은 두 인물의 관계를 큰 구도로 삼는 동시에,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을 배치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생각이 난 까닭은 아마 이 때문이지 않았을까.
진정한 선함이란 무엇일까. 과연 인간은 스스로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인간의 이중성.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기적이면서 배타적인 심리와 낮은 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소설 부활... 2권은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기다려진다. 겸허하게라는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겸허하게 다시 2권을 읽어봐야 할 일이다.
어쩌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까. 부활 1에서 마음에 다가오는 문단을 기록으로 남긴다.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선인이라든가 악인,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중간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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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한 인간을 두고서 당신은 성인이라든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선 당신은 악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인간을 그런 식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p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