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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말테의 수기
책을 구입하고 기록을 남기는 습관이 있다. 구입한 날짜와 구입경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름을 적어두고 있다. 대학시절 혹은 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습관이다. 말테의 수기의 겉 날개를 열면 2005년이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4월 28일. 오래된 책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책을 끼고 있노라면 이따금 눈과 목이 따가워진다. 2005년 그해 봄 4월. 나는 왜 이 책을 구입했을까.
말테의 수기는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다. 두 번째 읽기가 아닌, 도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책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백번 이해해주리라 생각한다. 책은 정말이지 읽다, 라는 표현보다는 도전, 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듯하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도전은 지금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말테의 수기는 어떤 책일까. 어려운 책이었다. 난해한 책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는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신입생 시절, 들고다니던 문고판 서적에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책을 아니 그 책의 제목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꼭 내게 충언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느끼며 혼자 착각 속에서 즐거워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즐거웠던 기억은 거기까지.
말테의 수기는 내가 간직하고 있었던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첫인상을 살짝 뒤틀며 바꿔놓았다. 물론 완벽하게 바꿔놓지는 않았다. 그 까닭을 생각해보면 이 책을 통해서도 역시 릴케가 지니는 시인으로서의 작가적인 심오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려 한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스토리의 연개가 부족하다. 기승전결을 따지기 어렵고, 절정이나 중심사건과 배경을 논하기에도 정돈되지 않는 서사가 이어진다. 오히려 이미지를 따라가며 서술하는 형식으로 읽혔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은 소설 보다는 시 창작의 기법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를 창작할 때 그 시작은 이미지를 찾는 것이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대학시절 시 창작 시간에 친구가 자신이 쓴 소설에서 문장 몇 개를 가지고 와 산문시를 써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이 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시도 소설이 될 수가 있는 것이었을까. 교수는 이미지를 강조했었다. 책 말테의 수기는 그런 차원에서 들여다보면 모든 것들이 이미지화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나름의 자잘한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면, 2부에서는 작가의 서선이 옮겨가는 대로 이야기가 직접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가가 사과를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과는 빨갛고 꼭지는 갈색으로 아직 싱싱하다고 상상하자. 작가의 시선은 곧 누군가 이 사과를 먹게 될 것인데, 그 누군가의 삶을, 그의 하루를, 바로 옆에서 살펴보기 시작한다는 식이다. 그는 아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의 옷차림을 남루하고 주름투성이며 밑단이 너덜너덜하게 풀려나간 낡은 잠옷을 입었다는 식이다. 이야기는 한없이 이어지고 다시 또 시선이 옮겨가면 새로운 곳에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는 형식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때문에 순간 한눈을 팔다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라며 이맛살을 찡그리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릴케의 강렬한 장점 중에 하나인 그만의 섬세한 시선은, 끝까지 지루할지언정 독자들을 쉽게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에서 나오는 문장은 무척 사실적인 동시에 감각적이고 현실적이다, 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작가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소설이나 시나 작품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공통으로 요구되는 ‘관찰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인물을 관찰하고, 주변을 관찰하고, 시대를 관찰하며, 인물을 둘러싼 사건을 관찰하는 일이 그 과정이다. 이 과정이 바로 릴케가 말하는 <보는 법을 배우다>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파리에서 보았던 암울한 현실은 책의 시작을 더욱 무겁게 끌어내고 있다. 병원이 등장하고, 병원으로 가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인간의 삶에서 어두운 면들을 들추어내어 카메라 렌즈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듯 세밀하고 상세해서 그래서 더욱 질척이는 듯하다.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워보였다. 죽음이란 그리고 삶이란, 혹은 실존이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던 것 같다. 말테라는 주인공의 어린시절의 회상과, 직접 경험하고 혹은 전해들어왔던 기괴한 경험과, 기억들의 이야기가 내 기억에 남는다.
죽은 자를 본다는 것은 행운일까. 충격일까. 신비일까. 공포일까. 책은 종종 죽은 이들의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곤 한다. 그것이 환영인지, 사실인지. 현실 같은 비현실을 보여주는 작가의 이야기에 그저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영혼 그리고 환영과 같은 것들을 인지하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의 심리를 반영하는 인간의 내적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지니는 보통의 평범한 두려움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 숨겨놓은 채 드러내지 않는 내적 두려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어른들은 영혼 앞에서 다양한 반응들을 보이기도 한다.
글이 너무 무겁다. 책이 워낙 분위기를 압도하다보니 내가 쓰는 글도 질척이는가 싶다. 조금 가볍게 가보자. 말테의 수기에는 인간의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삶. 그보다 앞선 죽음. 많은 수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이 모든 암울한 것을 뛰어넘는 사랑을 포함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끝으로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여담 한가지를 말해보자.
우리는 별 헤는 밤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을 알고 있다. 갑자기 동주 이야기는 왜 끄집어내는가, 한다면 내가 기억하는 동주의 시중에 바로 말테의 수기를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이 들어간 시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시인 윤동주가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서 직접 확인하게 된 부분을 인용으로 남겨본다. 어떤 면에서는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시인 윤동주는 ‘자아’ 라는 주제에 더 침잠하고 집중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소녀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꼬리가 달린 길쭉한 구식 문자로 나직하고도 날씬하게 씌어진 이름들을, 그리고 그들보다는 나이든 여자 친구들의 어른이 된 이름들을, 그 이름을 불러보면 약간 운명의 음향이 따른다. 약간은 실망과 죽음의 음향도
-말테의 수기 p50」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일부....-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의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정말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전기 요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말테의 수기 p64 」
-윤동주 시 ‘병원’ 일부-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자세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는 전문가들에게 가서 들어봐야 할 일이고, 감상과 느낌 그리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나로서는 여기까지만 잡담을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차후에 릴케와 윤동주에 관한 책을 찾아봐야 할 듯싶다.
책 말테의 수기를 읽다가 정확하게 가운데 부분이 쩌억 갈라지는 사고 아닌 사고가 있었다. 오래된 책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누렇게 빛바랜 종이하며 갈라져 찢겨져버린 책이 안쓰러운 것까지 어쩌랴.... 이건 분명 여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