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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그리스인 조르바
-너무나 인간적인 당신. 조르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이 작품이 지닌 문학성에 대해 놀라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을 읽은 후 이제는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학적 감각이 뛰어난 문장들과 묘사, 인물의 대사를 통한 심리와 갈등 등. 흔히 말하는 문학성을 뛰어넘어 전체적으로 볼 때, 소설은 한권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삶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며 궁극적으로 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본 이후, 이 작품을 함부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것 같다.
우리가 믿고, 따르며, 의식하는 모든 것은 이중적이다. 선과 악이 늘 공존하는 것처럼 인간의 이성과 감성에도 역시 천사와 악마가 함께 공존한다. 인간의 삶이 그러하고, 인간이 속해서 살아가는 그 짧은 생을 영위하는 이 드넓은 혹은 비좁은 세계도 그러하다.
영원이란 무엇일까. 정말 영원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화두를 던진다.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란 것을 어떻게 해야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외에 종교와 현실의 부조리, 가련한 여인들까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간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집약해 판화처럼 찍어낸 작품 안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계속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의 생각을 말해보세요, 라고.
-나(두목)와 조르바.-
주인공 나는 조국과 그리스인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절친한 친구와 헤어지면서 크레타 섬으로 가게 된다. 배 안에서 화자인 나는 ‘조르바’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작품에서 조르바는 중심인물이자 작가의 사상과 철학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평생 과부들의 꽁무니를 쫒아가느라 단 한 번도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법한 이 인물은, 순간의 사랑을 영원으로 포장하며 살아가는 인물로 소개된다. 꾸미지 않은 야성의 순수한 인간미를 표출하며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지칭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주인공인 내게 불현 듯 나타나 동행할 것을 제의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만남부터 조르바는 내게 두목이라 칭하며 묘하고도 친근한, 어떤 절대적인 인연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 화자인 나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 낯설고 생경스러운 만남을 통해 주인공 나는 배척이 아닌 긍정의 호기심으로 그를 받아들인다. 또한 조르바와 함께하면서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옥죄이고 있던 가식과, 수없이 많은 형식이 만들어내는 부조리와, 거추장스러운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찰나의 자유,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무슨 까닭으로 조르바를 이토록 자유분방함을 즐기며 구속받지 못하는 날것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창조한 것일까. 반면에 극단으로 비교가 되는 화자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질문을 하다보니 작가의 의도를 알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 상처-
작가는 소설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실 조르바는 겉으로 봤을 때 호탕한 인물로 인생을 달관하고 산전수전 그리고 공중전까지 다 겪어낸 노련한 인물로 보이지만, 이러한 조르바의 이미지는 본질을 가리기 위한 연막과 같은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조르바는 신을 부정한다. 이로 인해 허탈과 좌절, 낭패감으로 스스로를 자신만의 감옥에 가둔다. 전쟁에 뛰어들면서 양심의 가책 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무심하게 인간의 감정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일순간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그 상처 뒤에 남겨진 이들의 고단한 삶을 대면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결국 조르바라는 인물은 자신의 본질적인 상처와 대면하고, 타인의 상처를 돌아보게 되면서 자기극복과 승화, 그리고 성찰의 계기를 맞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이 끝나갈수록 조르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막무가내로 여자만 따라다니고, 부조리 앞에서 세상을 향해 큰 웃음으로 비웃어주던 이 방탄한 인물의 조르바가, 사실은 상처를 끌어안은 채 스스로 모질게 강해지기 위해 부단히 버텨온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조르바의 인생의 길고 긴 방랑과 방황의 바람을 알 것도 같았다.
작품에서 화자인 나는 늘 붓다를 생각한다. 가장 바람직한 절정의 순간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는 존재로서 완전한 존재인 붓다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작품에서 붓다는 바로 조르바, 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살아있는 생불, 살아있는 생부처인 셈이다. 고통을 승화하고, 거추장스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구속되지 않는 영혼과 육체, 모든 것의 자유를 우리에게 보여주던 이가 바로 조르바였기에.
가련한 여인들(부불리나와 과부)을 사랑하고 보듬어줄 줄 알았던 조르바는 스스로가 부정하던 신의 역할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때로는 거칠고 무모하며, 딴은 다정하게. 그가 솔직했던가, 솔직하지 못했던가, 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 인간 조르바가 행했던 일은,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발현한 거룩한 신의 은총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p 320-
-나는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 눈물이 내 앞을 가렸다. 이게 인생이거니……. 변화무쌍하고, 요령부득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무자비한 인생 - p374
-자기들 자신의 해묵은 슬픔이 마음을 독처럼 파고들면서 만가는 바야흐로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p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