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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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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라는 말은 여기 소개된 10권의 저작들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하 불경스럽기는 하지만 '노통'이라 약칭하자)이 호오를 불문하고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정책 혹은 사상 구상에 크게 참조했다는 말일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 책에 소개된 10명의 석학들이 제출한 저작 내용 전체에 대해 노통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많은 부분 동의했다는 말일 터이다. 그러니 10권으로 '노무현을 말한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예상은 그게 어긋나지 않았다. 10권의 저작에 대해 품평을 담당한 인사들이 모두 노통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은 이들이고 이들의 해제를 보니 대개 노통이 크게 감명받았다거나 참고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저술활동에 지침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소개된 10권의 저서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은 저작들이다.  

신자유주의시대,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복지축소를 필두로 내건 국가축소론자들을 논박하면서 기업가-갈등조정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불평등이라는 잣대를 통해 미국현대사를 진보와 보수의 틀로 나누고 진보의 편에 서서 역사발전을 주장하는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1970년대 후반 이래 급속히 와해되어 버린 시민사회, 바로 그런 시민 존중 가치 시스템의 붕괴 배후에는 이름바 양적인 측면에서 세계적 번영을 구가하게 만든 슈퍼자본주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착한 기업을 용납하지 않고 시민 실종의 민주주의 파괴로까지 치닫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 

그외도 <더 플랜>, <빈곤의 종말>. <유러피안 드림> 등 모두 10편의 주옥같은 저작에 대한 강독과 품평이 담겨있다. 

모두 이 시기에 우리가 논의하고 탐구해볼 만한 내용들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가진 자, 힘센 자' 중심의 정책을 마구잡이로 펼쳐 나가는 작금에 있어서는 더없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노무현을 말하기에 앞서 10편의 세계적 저작을 해설서 형태로 읽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전문가 혹은 관련 전공자들이 나름의 정성을 갖고 소개하는 편집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사실 일반인들이 언제 시간을 쪼개 꼼꼼하게 이 모두를 독파할 수 있겠는가? 신문 신간소개나 출판사의 소개글만으로는 불충분한 탐색과 지적이 이런 형식으로는 가능하기에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 과연 이 책, 이 강독을 통해 드러난 노통은 어떠한가?  굳이 이 강독회에서 주발표를 맡은 인사들의 찬사, 흠모, 향기로운 추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짬짬이 남긴 회고담 혹은 단상, 그리고 미완의 원고들을 접한 우리로서는 민주주의, 참여, 시민사회, 공동체, 환경우선, 거대자본에 대한 경계, 민주적 원칙을 지켜나가는 국가의 정당한 역할 강조, 생활 진보 등에 대해 그가 참으로 진지하게 천착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 포함된 10권의 책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읽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타까운 일은, 이 책에 담긴 10권의 저작을 읽고 노통이 새로이 그러한 여러 '생각'들을 지닌 것이 아니라 비록 완벽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노통 스스로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발제하고 논리를 다듬어 나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사상가'로서 존경받을 만하다. 

출판사에서는 노통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배우자는 취지에서 이런 강독을 기획하였고 그 기록을 이런 도서로, 부산물로 우리에게 선사하였는데, 앞으로 굳이 노통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주제별 강독회를 열고 기록을 담아 책으로 만든다면 독자로서는 단순 해설서를 넘어 폭넓은 서평을 대하면서도 진지하게 양서의 축약본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열중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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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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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처녀귀신'. 여름이면 납량특집으로 어김없이 화면에 등장하는 처녀귀신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책이 <처녀귀신>이다.  

어린 시절 시골생활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련한 공포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즈음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당시의 환경에서 밤이 되면 가장 가기 싫은 곳이 바로 '뒷간'이었을 것이다. 집의 가장 으슥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뒷간행은 정말이지 괴로운 경험이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믐의 어두운 밤이면 변이 마려워도 배를 눌러 가며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그리도 뒷간엘 가기가 무서웠을까? 

바로 그 뒷간에는 어김없이 '귀신'이 나타나 끌어당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집 근처에 대나무 숲이라도 있을라치면 스스스거리는 댓잎소리를 배경으로 영락없이 소복입은 처녀귀신이 나타나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고 갈 것 같았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처녀귀신이 왜 나타나리요마는 우리의 정서엔 알게 모르게 처녀귀신의 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한국형 처녀귀신'을 해부한 것이 이 책 <처녀귀신>인데, 저자는 조선시대 야담과 민담을 토대로 이를 자세히 분석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도깨비 혹은 귀신의 전형으로 '처녀'가 주로 등장하는 이유를 봉건시대 우리 여성들이 겪었던 불행한 삶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주장이나 입장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희생의 대상이었던 것에서 연원을 찾는 것이다. 억울한 죽음 혹은 죽임을 당한 여성들은 급기야 원혼의 모습으로 자신의 원한을 갚아 줄 누군가에게 나타나 진실을 밝히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저자의 분석과 설명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세계관에 대해, 그리고 그 시대 여성들의 핍박받던 삶에 대해 조금만 천착해보면 이는 쉽게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내용전개에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 새삼스러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처녀귀신으로 대표되는 우리 귀신과 드라큐라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원혼 혼령 이야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많은 문학작품, <오멘>류의 영화 등을 통해 접한 서양의 귀신 이야기는 주로 귀신들이 자신의 사연을 밝히기 보다는 현세의 누군가에게 집요하게 복수를 하거나 많은 이들에게 해꼬지를 하는 것으로 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우리네 귀신들은 자신에게 해악을 입힌 이들에게 직접적인 복수를 하기보다는 하소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즉, 귀신이 직접 자신의 복수극을 펼치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대리역할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이 책 <처녀귀신>에서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대개 남성이기 마련인 어질고 현명한 관리의 손에 의해 진상이 밝혀지고 복수하며 원한을 푼 귀신은 그때부터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다.  

좀 거칠게 도식화 하자면, 우리네 귀신은 수동적, 간접적인 반면에(그러니까 자연히 주인공이 아니라 제일의 조연이다) 서양식 귀신들은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행동파, 당연히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점을 천착해보면 문화, 관습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뭔가의 탐색거리가 생길 듯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은 제명에 걸맞게한여름의 더위에 맞는 문화적 탐색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처음 전반부 초반에는 처녀귀신에 대한 종합분석을 시도하겠다는 야심을 보여주더니 점점 중반부 이후에는 자살의 사회문화적 분석 등에 치우쳐 본격적인 종합 <처녀귀신> 분석서로서는 궤를 벗어나 버렸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갈증을 없애려다 김빠진 맥주에 얼굴을 찌푸리는 꼴이 되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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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마을의 꿈>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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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작가인 옌롄커의 작품을 손에 받아드는 순간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爲人民服務>를 읽으면서 얼마나 요절복통 웃었던지 그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면서 나도 모르게 슬금거리며 웃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은근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낄낄거리는 비아냥을, 그리고 때로는 서글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한편,  가슴저리는 아련한 슬픔, 애잔함 같은 걸 동시에 던져주곤 한다. 

이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은 온통 붉은 빛이다. 노을이 핏덩이처럼 뭉쳐 있던 황혼에 물든 늦가을의 어느 날에 시작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주인공 할아버지(서술자인 '나'의 할아버지)가 상부에서 개최한 회의에 참석하고 딩씨마을(丁莊)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핏빛' 배경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피팔기(賣血)'와 '피토하며 죽는 참상'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서술자는 샤오창이다. 열두 살의 나이로 독살당한 소년이다. 소설 속 사건 전반에 걸쳐 두루 활약하는 할아버지의 큰 손자이며 마을의 최대부자인 어버지 딩후이의 하나 뿐인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피뽑아 장사하기와 그로 인한 에이즈 감염때문에 독기를 품은 마을 사람 누군가에 의해 독이 든 토마토를 먹고 죽었다. 그리고는 마을의 초등학교 담벼락에 묻혔다. 그런 '나'는 마을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며 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 친지들의 생활을 들여다 본다. 한바탕 꿈일 수 있겠다.  

이야기는 십여년 전 느닷없이 상부마을(그러니까 딩씨마을은 우리의 '리' 나 '면' 단위 쯤이고, 상부는 '군' 혹은 '시' 단위와 '도' 단위 일테다) 간부가 마을 찾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피'를 뽑아 팔기를 권장한다. 인체 속의 피는 마치 모래톱을 깊이 파면 지하수가 샘솟아 나오듯 적정량을 뽑으면 자꾸 퐁퐁 솟아나는 것이기에 규칙적으로 뽑아서 팔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적정한 가격을 붙여 대가를 지불할 것이므로 새피를 갈아주니 건강에도 좋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며 마을 사람을 설득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던 마을 사람들이 먼저 매혈을 시작하여 잘살게 된 이웃마을을 탐방하기도 하면서 하나 둘 매혈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 과정에서 타고난 사업수완을 지닌 아버지 딩후이가 사설 매혈사업에 뛰어들어 일약 '피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매혈로 인한 돈벌이로 즐거움을 누린 것도 잠시, 마을 사람들은 비위생적인 채혈로 인한 대대적인 에이즈 감염으로 고통을 겪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거의 모든 가정에 에이즈 환자가 발생하게 되고 이들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학교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에이즈에 감염된 나의 삼촌인 딩량은 같은 환자로 학교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사촌 제수인 링링과 동병상련의 사랑에 빠지고 둘은 불륜의 행각을 계속한다. 한편, 아버지 딩후이는 매혈사업 뿐만 아니라 관사업, 영혼혼인사업 등으로 부를 더욱 축적하고 드디어는 신시가지로 이사를 떠나려 한다. 에이즈 환자가 창궐하고 마을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 저간에는 아버지의 무분별한 매혈사업이 있음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더러 마을 사람들에게 사죄할 것을 종용하지만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가뭄과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삼촌과 링링도 죽는다. 대지는 핏빛으로 타오르고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우여곡절을 겪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떼돈을 벌어들인 아버지는 신시가지에 아방궁 같은 호화스런 저택을 짓고 이사하고 드디어는 '나'의 영혼결혼을 대대적으로 준비한다. 딩씨마을 인근  멋진 언덕배기에 마련한 나의 새로운 묘지로 나의 백골과 영혼이 이장되던 날, 마침내 할아버지는 모든 죽은 이들과 산 자들의 염원을 대신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버지를 뭉둥이로 내리쳐 살해한다. 할아버지는 자식 살해의 혐의로 수감되지만 그 자식의 불법부당한 착취와 부의 축적을 고발하므로써 수개월 후에 석방된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던 대지에 비가 내려 흠뻑 적시고 새로운 잎들이 무성히 자라나는 시기를 맞춰 석방된 할아버지는 텅 빈 마을 찾아오는데, 대지의 소생과 함께 진흙탕 속에서 인간들이 불쑥불쑥 자라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이야기는 끝맺는다.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이는 자본주의화 되고 그런 과정에서 오로지 이윤과 이익을 탐하는 무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며, 한편으로 대다수 무지한 인민들은 그 착취의 그늘에서 가난과 질병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공동체적 삶의 기반도 파괴되기에 이른다. 이 소설은 오늘 중국의 이 비극적 실상을 그려내고 고발한다.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중국사회 전반의 비인간적 변모를 통렬히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상부의 간부들이 일방적인 지시로 인민의 피를 뽑아내고 딩후이같은 신흥자본가들이 갖은 방식으로 인민의 골수를 뽑아내는 중국의 현실은 가뭄으로 메말라 타들어가는 대지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작가 옌롄커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서도 그랬듯이 중국의 개방화에 따른 자본주의적 침탈 과정을 해학과 풍자를 통해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 공동체적 질서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비가 내려 대지를 싱싱하게 만들고 진흙인간들이 새로이 탄생하는 장면을 통해 여전히 희망을 말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인민을 위해...>에 이어 이 소설 <딩씨마을의 꿈>마저 판매금지, 홍보금지 조치를 내려 '인민'이 작품을 접하지 못하게 한 배경에는 '희망' 보다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염려했음일 것이다. 본시 권력자들은 무엇이든 미래의 희망보다는 당장의 악을 덮으려고만 한다. 지금 현실의 악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큰 비극을 막고 새롭고 건강한 내일을 만들 수 있음을 알면서도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근시안적 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른 바가 없다.  

활기차고 서로를 보듬고 살뜰하게 보살피며 정을 나누는 행복한 <딩씨마을>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를 나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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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나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새벽의 나나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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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의 두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을 읽으면서 작가가 꽤나 심각한 이야기를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고 인문학적, 혹은 사회과학적으로 정제된 논리를 서사구조에 깔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소설 <새벽의 나나>에서 작가 박형서는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리얼리즘이 한층 강화되었다고나 할까? 하기야 <새벽의 나나>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기조를 두고 '리얼리즘'이라는 한 용어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래서 굳이 진단을 하자면 꿈과 전생의 인연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점으로 미루어 일종의 환상의 리얼리즘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이야기는 마흔살의 한국인 레오가 7년동안의 결혼생활을 접고는 태국을 다시 찾아 휘황한 네온 불빛 아래 술과 마약과 매매춘이 난무하는 방콕의 거리에서 매춘부(작가는 굳이 '매춘부'라는 그럴듯한 용어보다는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보다 노골적이고 혐오스런 용어인 '창녀'를 사용한다. 이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비하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이리라) 라노를 수소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과거 그 일대에서 겪은 수이 식스틴의 많은 인물들과의 진한 인연을 추억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태국 방콕의 한 거리 수쿰빗 소이 포(우리식으로 하면 '종로3가' 정도 될 터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네 현실 역시 3~4십년전 지금의 허리우드 극장 근처 그리고 파고다공원 뒤편 종로3가 일대가 이른바 '종3'이라 불리는 유명한 집창촌이었고 청량리역 주변, 미아리 길음동 일대 등이 '588' 식으로 불리는 집창촌 이었음이 상기된다), 일명 '나나' 거리에서 레오는 유명한 매춘부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는 라노를 찾으면서 모두 세번에 걸친 나나거리에서의 경험과 사랑 아닌 사랑을 추억, 반추하고 있다. 그 자신이 지금 파탄난 결혼생활에서 도망쳐 나온 실패자이듯 과거 그가 관계를 맺은 소이 식스틴의 파란만장한 인물군상 역시 실패자들이었음을 전편에 걸쳐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레오는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아프리카행 여행을 목적으로 중간 환승 기착지인 태국에 며칠 머물게 되면서 우연찮게 국수 한 그릇을 먹는 노점에서 소이 식스틴 거리의 유명한 창녀 플로이를 만나게 되고 몇마디 말을 주고 받는 동안 '필'이 꽂힌다. 다음날 앞날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레오는 무작정 플로이를 찾아가고 그곳 어두침침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좁은 플로이의 집에서 '플로이의 식구'가 된다. 리싸, 똠, 아팡, 수진, 욘, 나왈랏 등 창녀, 그리고 커텐 업자였다가 마약상으로 변모한 샨네 가족, 유산으로 먹고 마시고 피우는 생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우웨 등 하류인생들의 비참하고도 너절한 생활에 동참한다. 본시 레오가 플로이를 찾은 것은 전생에서 부부였을 정도로 자신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맺어졌다는 강한 확신이 들어서였고 당연히 플로이가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며 그니의 애정을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중심된 인물인 플로이는 레오의 이런 강한 열망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매춘생활과 동료 창녀들의 생활에만 관심을 가지고 레오에게 냉랭하게 대한다. 레오는 틈날 때마다 플로이의 애정을 갈구하면서 아프리카행 여행경비를 마치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사용해가며 플로이네 식구들의 생필품 구입, 군것질 비용, 마약 구입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한다.  

레오 자신은 할 일 없이 우웨의 방을 드나들며 동네 남자들과 어울려 마약 흡입, 음주로 일관하며 무위도식의 파탄난 삶을 이어가고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플로이는 여전히 레오의 '사랑'에는 무관심하다. 이런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던 레오는 급기야 돈이 바닥날 즈음 더 이상의 타락과 방종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귀국한 레오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3년정도 일에 열중하지만 소이 식스틴과 플로이의 잔영이 수시로 찾아오는 가운데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먹먹한 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대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잠깐 잃는 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소이 식스틴과 플로이가 보이고 급기야 훠이훠이 다시 방콕행을 결정한다. 3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소이 식스틴은 변함이 없다. 여전한 거리 모양새, 여전한 삶들이 기다리고 있는 플로이의 거리....레오는 다시금 3년전 플로이네 생활을 반복한다. 물론 비참한 하류인생들의 삶에 어찌 아무런 변화가 없기야 하겠는가? 누구는 죽어나가고 누구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누구는 더 비참해지고 또 누구는 그런 와중에서도 나이들어 성장하고....하지만 그런 자잘한 변화가 이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채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것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물론 플로이는 레오를 다시금 식구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전의 '거리두기'는 계속한다. 

이번에도 레오의 생활 역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예전의 그대로이다.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인물들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기도 하고 하류인생들끼리 돈벌이를 두고 아귀다툼하는 모습도 보며 마약과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던 나는 이번에도 3년전과 다름없는 초라한 몰골로 나나거리를 빠져나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다시 4년만에 이번에는 플로이의 어이없는 죽음 소식에 급거 방콕으로 날아와 플로이의 장례를 치른다. 지난 4년여동안 소이 식스틴은 독점자본과 외국자본이 밀려들어와 이른바 '재개발'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어 버리고 창녀들은 주변부로 다시 밀려나 더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목격하면서 레오는 주저하지 않고 소이 식스틴을 떠난다. 이번에는 자신이 영어를 가르친 어린 소녀 라노가 아마도 나나 일대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임을 예감하면서..... 

이 소설은 레오와 플로이의 인연과 애증을 밑자락으로 하면서 나나 거리의 비참한 하류인생, 비극적 군상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플로이는 그 거리에서 이른바 '큰 언니' 역할을 하는데, 이는 자신을 거두어 준 지아의 후계자 역할이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매춘부와 게이들의 사회에서 플로이는 일종의 정신적 지주이자 갈등 조정자이며 삶의 애환을 같이 나누는 상담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이는 동질의 그들에게 군림하지 않는다. 그저 몸으로 마음으로 모든 걸 감수하고 겪어낼 따름이다. 그들만의 사회에서 플로이는 일종의 '권위'이다. 이런 플로이를 향한 레오의 연정은 플로이로부터 '가식과 허위'로 비난받는다. 레오의 애정어린 시선을 플로이가 감내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는 이유는 레오가 단지 국외자로서 일시 머무는 '딴 사람'일 따름이며,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그들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하는' 제3자일 뿐 결코 그들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로이는 레오보다 더 진한 삶의 질곡을 겪으면서 그걸 체득하였고 플로이 개인이라기 보다는 소이 식스틴 사회 그 자체인 반면, 레오는 오직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운 개인 레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레오는 7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두번의 플로이 식구되기 생활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그걸 깨닫지만 이미 플로이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하기야 레오가 그런 뒤늦은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해서 플로이가 레오를 '연인'으로 받아들였을 리는 없겠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주인공들의 사랑, 혹은 곡절의 인연을 그리고자 하지 않는다. 태국이라는 개발도상국,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매춘과 마약을 탐하는 이지러진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문어발을 뻗치며 민중의 삶을 갉아먹고 탐식하는 거대자본의 논리를 소이 식스틴의 하류인생의 거친 삶과 변모를 통해 여실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소이 식스틴에 위용도 당당하게 건설되고 있는 호텔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비루한 삶의 환경을 바꿔주리라 기대하며 화제거리로 삼는 소이 식스틴 주민들의 즐거운 표정을 일컬어 "강간범의 씨앗이 자라나는 배를 자랑스럽게 어루만지는 철없는 계집아이 같다"고 암울한 심정을 토로한다. 레오가 두번째로 떠나 다시 플로이의 죽음으로 잠시 방문한 시기에 발견한 소이 식스틴의 변모는 바로 그런 작가의 예측과 진단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사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등장하는 많은 창녀--태국의 딸들, 캄보디아의 딸들, 미얀마의 딸들, 그리고 혼혈의 다국적 딸들은 모두 어린 시절 한결같이 남성들, 특히 가까운 친척 남성들로부터 겁탈, 추행, 강간을 당하는 등 성적인 착취와 억압을 겪거나 지독하게도 무지하고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서 생존을 위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이즈음 전 지구적 화두인 세계화로 인한 제3세계 민중의 열악해져가는 삶의 단면들이 여기 소이 식스틴에 고스란히 모여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동두천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던 주한미군과 연결된 집창촌, 이른바 기생관광으로 이름붙은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한 매춘행위, 그리고 신흥자산가들의 일탈행위를 충족하기 위한 도시 변두리의 매춘 등등 1970년대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외화벌이'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누이와 딸들'의 암울한 성적 착취가 횡행하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사회의 '산업'으로 자리잡은 '성 산업'이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인격 자체를 담보로 자신의 몸을 헐값에 넘겨야 했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이른바 <영자의 전성시대>로 대표되는 그쪽 방면의 소설문학이 판을 치던 시대가 바로 그런 우리의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새벽의 나나>에 등장하는 태국의 그녀들이 남이 아니고 먼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닌듯 느껴지는 것이다.  

작가는 나나 거리의 그녀들을 결코 미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들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 처절한 자본의 논리. 암울한 남성 중심의 사회 아래서 당할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며 그들의 삶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고 나름의 운행법칙이 있으며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이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그녀들이 자신들만의 희노애락을 나누는 방식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래서 레오의 입을 통해 말한다. 지아의 뒤를 이은 플로이가 그랬듯 이번에는 라노가 역할을 이어받아 소이 식스틴, 나나 거리의 참된 주인이 누구이며 밟혀도 밟혀도 결국은 부는 바람따라 다시 몸을 일으키는 잡초처럼 그녀들의 삶은 끈질기게 계속될 것임을. 

군더더기 별로 없는 빠른 흐름, 전생의 인연과 현실의 삶을 연결시키는 환상적 서사구조, 작가의 체험을 반영한 사실감 넘치는 현장 묘사 등으로 이 소설은 순식간에 읽힌다. 후일담 혹은 가벼운 일상사, 그리고 세태를 반영한 신변잡기, 첨단의 정보통신을 무기로 한 게임식 이야기 등이 난무하는 이즈음의 소설계에 드물게 묵직한 주제를 리얼리즘으로 그려낸 이 작품이야말로 단연 돋보인다 하겠다. '플로이 이야기'인 이 작품에 이어 작가의 '지아 이야기' '라노 이야기'도 기대된다. 만약 3부작이 탄생한다면 그저 장편식의 동일한 이어짐이 아니라 그 방식과 서사구조는 모두 다른 것일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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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의 골프 -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천재 18명의 인생 수업
밥 미첼 지음, 김성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저자 [밥 미첼]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인물이다. 책 안쪽 날개의 저자 이력을 보니 문학에, 특히 프랑스 문학에 일가견을 지닌 인물이고 각종 스포츠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물론 본인이 직접 해보지 않은 운동 종목이 없을 정도의 만능 스포츠맨이라는 소개다. 많지는 않은 저작 모두 야구와 인생, 스포츠와 '道(Tao)'를 다룰 정도로 스포츠를 밑자락으로 하는 작품들이다. 

마치 저자 자신을 연상케 하는 문학교수이자 스포츠 광팬인 주인공 엘리엇 굿맨(사실상 저자 자신이 엘리엇 굿맨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13쪽 하단에서 14쪽 상단에 걸쳐 나오는 대목인데, 하버드대학 와이드너 메모리얼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는 엘리엇 자신의 저서라는 <감성에는 나름대로의 이성이 있다>가 바로 저자인 밥 미첼의 저서와 동명이라는 점이다)이 심근경색 증상으로 인해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고 혼수상태에서 하나님이 찾아와 내기골프를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내기골프에서 이기면 다시 한 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지면 이대로 목숨이 다하는 것으로 하자는 하나님의 제안에 엘리엇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18홀의 내기골프에 임하게 된다. 

아뿔싸, 근데 첫번째 홀부터 등장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인 상대선수가 사람을 기죽이는 역사적 위대한 인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긴 수염을 휘날리며 필드에서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엘리엇은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놀라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되찾는 일이 걸린만큼 기죽지 않고 게임에 임하리라 작정하는 한편, 위대한 인류의 스승에게 그간에 궁금했던 점들을 질문해가면서 열심히 골프에 전념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엘리엇은 18홀 전 코스에서 위대한, 혹은 훌륭한 각계의 인물을 만나고 이들에게서 단순히 골프 기술만이 아니라 인생의 참의미에 대해 하나씩 새롭게 깨쳐 나간다. 

다빈치에게서는 결단력을, 필즈에게서 무아의 경지를, 모세에게서는 정의를, 비틀즈의 영원한 신화인 레논에게서 즐거움을, 프로이트에게서 집중력을, 에드가 알란 포에게서 동정심을, 소크라테스에게서 자각을, 잔 다르크에게서 노력을, 작은 베이브에게서 겸손을, 마릴린 먼로에게서 자만의 위험을, 피카소에게서 자립심을, 링컨에게서 성실을, 베토벤에게서 열정을, 세익스피어에게서 인간성을, 베이브 루스에게서 재능의 다양성을, 콜럼버스에게서 모험심을, 간디에게서 마음의 평정을, 벤 호건에게서 과감성을 차례로 배워나간다. 이런 깨달음과 성찰의 과정에서 엘리엇은 일방적으로 그 인물들에게서 배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들과의 열띤 토론을 벌려 나가므로써 진정한 앎의 세계를 열어 나간다. 물론 골프의 여러가지 기술, 스윙과 샷, 퍼팅 등등에 대해서도 전문골퍼 못지 않은 다양한 경우들을 배치하여 마치 박세리나 아니카 소렌스탐에게 개인지도 받는듯한 재미도 만끽하게 한다. 

엘리엇은 우여곡절, 파란만장 끝에 아쉽게 시합에서는 간발의 차로 석패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등장하신 하나님은 '살아 있는 마음'이 진정 무엇인가를 설파하여 엘리엇의 남은 인생, 혹은 제2의 인생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주신 후 삶을 되돌려 주신다. "시합에는 졌지만 열린 마음으로 플레이를 하고 마음 속에 간직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결국 목숨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엘리엇의 감격적인 한 마디가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유일한 선물'이 되는 셈이다. 

<천국에서의 골프>는 소설 혹은 에세이라기보다는 처세, 혹은 자기성찰용 내용을 문학적으로 포장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 싶다. 하여, 이 작품을 두고 작품성이나 예술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엘리엇과 함께 그리고 18인의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푸른 잔디 펼쳐진 필드를 거닐며 인생공부하는 것으로 족하다. 문제는 누구나 알 것 같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드러난 제대로 된 삶을 진정으로 사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는 사실, 우리들 범인들은 참으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될 따름이다. 그게 내가 배운 가르침이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듯 싶다. 반성하고 다시 기회를 얻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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