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쪽


1. 어떤 형태 어떤 분야의 학문을 하든,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기초적이고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개입이 그 학문에 필요불가결함을, 샤피로는 인정하고 들어가는 듯하다 그 학자가 그렇게 개입하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something가 정확히 무엇<으로> 기술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여하간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지 정도의 수준에서만, 우리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형이상학과 인식론 둘 중 하나에의 가중치가 변별될 수 있다* 이상화된 수학적 대상을 무엇<으로> 식별하는 일, 가령 논리주의마냥 논리학으로, 혹은 형식주의마냥 기호들과 그 체계의 규칙으로 식별하는 일이 가망이 없다면, 직관주의자는 이상화된 <대상>에서 눈을 거둬들이고 <이상화>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그런 식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 자체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이미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ㅡ그에 덧붙여, 형이상학과 인식론 양자에서 제기돠는 부담을 덜고자** 비숍식의 중립적 구성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여하한 수학철학적 사유도 경유하지 않은 채, 그저 일상적이고 평화롭게 이해되는 바로서의 수학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인바, 이는 ‘수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수학은 수학이다‘라고 답하는 격이다 그리고 이는 그 질문을 그냥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직관주의 입장에서 ˝자유선택 수열이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이 이러한 무시(무시1)에 해당한다면(즉 직관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면), 고전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중간 배제[배중률]가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 역시 그러한 무시(무시2)에 해당한다(즉 고전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전자가 그러한 무시1을 용납할 수 없을진대, 후자도 그러한 무시2를 용납할 수 없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초두에 말한바 그 어떤 학문분야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상정된다는 역사적, 원리적, 철학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2. 불분명하고 무심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적 논증의 한 사례이다 (내가 재구성한)

3.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상적인 직관을 벗어나는 수준에서라면, 존재론적으로 기운 철락자에겐 인식론적 부담이 큰 반면, 인식론적으로 기운 철학자에겐 존재론적 부담이 크다는 일반적 경향이 철학사를 통틀어 관찰된다


** 나는 언어철학에서 내포 문재와 관련하여 비슷한 스탠스를 취한 인물로 R. 몬테규를 생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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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 - 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
레베카 골드스타인 지음, 고중숙 옮김 / 승산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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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관해 평이하면서도 알차게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교양서이다. 괴델 증명의 개요를 비형식적으로 평이하게 해설할 뿐만 아니라, 그와 얽힌 전기적 사실 및 가벼운 철학사적 사안들도 자연스럽게 엮어내고 있어, 불완전성 정리는 고사하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학철학을 전연 모르는 일반적인 독자층도 아주 쉽게 읽어나갈 수 있겠다. 이 책마저 버거울 듯한 수준이라면 이보다 앞서 박정일, "괴델&튜링: 추상적 사유의 위대한 힘"을 먼저 읽은 뒤 이 책으로 넘어오면 될 일이고, 이 책을 읽고 더 흥미를 느낀다면 M. Klein, "수학의 확실성"과  E. Nagel, "괴델의 증명"으로 심화시켜볼 수 있겠다. 다만 책 전체에 걸쳐 괴델의 수학적 실재론 입장이 자주 환기 및 강조되는데,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저자의 서술을 좀 더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수학철학에서 전개된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다소 이해하고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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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실재론을 넘어서서 - 퍼트남과 데이빗슨의 제3의길
배식한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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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개관하면서 퍼트넘과 데이빗슨의 관점을 옹호하고 있는 전문 연구서이다. 저자의 학위논문을 토대로 저술된 책이어서인지, 퍼트넘과 데이빗슨의 이론은 물론이요 주제와 연관된 여타 철학자들의 이론들 및 그 문제점도 심층적인 수준에서 그 핵심만이 빠르게 해설 및 논평된다(그렇다보니 책의 분량도 길지 않은 편이다). 이에 초급자가 무턱대고 읽기에는 난이도가 많이 높고, 철학과 학부생 3, 4학년 정도에게나 읽는 소득이 있을 듯하다. 기본적인 분석철학사와 더불어 논리철학, 언어철학(및 지향성, 명제태도 등을 다루는 심리철학 일부), 인식론, 과학철학 등에 대한 폭넓은 선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저자의 압축적인 논의를 유의미하게 따라가며 자신만의 생각거리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실재론-반실재론 쟁점 자체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퍼트넘의 내적 실재론과 데이빗슨의 언어철학이 이 논쟁에 대해 함축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하기 늘상 어려웠다. 제임스 래디먼의 과학철학책이나 A. C. 그렐링의 논리철학책, 데이빗슨의 언어철학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이영철, "진리와 해석" 등에서 해당 주제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긴 한데, 그것들을 읽을 당시엔 배경지식이 많이 부족해 제대로 소화해내질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이 단행본을 오래 전 알게 된 뒤로 벼르고 벼르다 이제사 구매해서 읽어보았는데, 퍼트넘과 데이빗슨의 이론뿐만 아니라 주제와 연관된 여타 철학자들의 이론 및 논쟁도 조감해볼 수 있어 적잖이 도움이 된 독서였다. 특히나 콰인의 의미론과 존재론을 그의 자연화된 인식론을 중심으로 재구하면서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2장 '나'절이 (책의 중심부는 아니지만) 흥미롭고 인상깊었다. 주제에 대한 저자의 깊은 탐구력과 능숙한 해설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다만 서술이 압축적이고 분량이 짧아 여전히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솔직히 더 많다. 앞서 언급한 책들을 다시 찬찬히 읽으며 보완해야겠다. 늘 그렇듯 책 하나를 읽으면 읽어얄 책권들은 더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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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수학이란 무엇인가 궁리하는 과학 5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지음, 오채환 옮김 / 궁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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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집중해서 읽으면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좋은 교양서이다. 목차를 일별해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수학의 기초적인 개념, 기법, 분야, 이론의 개요 등을 그 핵심이나 기본 착상만 간추려 기술하고 있다. 전문적인 수식이나 기호식은 가능한 한 최소화한 채,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진중한 자연언어로 쉽게 풀어쓰고 있어서, 중고등학교 수준의 수학교육은 받았되 기술적, 세부적인 사항은 다 까먹은 사람이라도 무리없이 이해해가며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니, 주입식 교육에 휘말려 공식들만 잔뜩 욱여넣은 채 반복숙달하는 중고등학생이라든가 수학적 지식에 일말의 갈증을 느끼는 학부 이상의 인문학도들은 물론이요, 수학을 도구삼아 거침없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시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일반 독자층에게도 일독을 적극 권하고 싶다. 

 유일한 단점은 품절되었다는 점 뿐이다. 이년 전 봄에 구매해서 초독 후 내용이 워낙 좋아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리뷰를 작성하려 검색해보니 그새 품절되어 있다. 품절일자가 그해 십일월로 돼있는데 하마터면 놓칠 뻔한 셈이다. 증쇄가 될진 모르겠지만 여하간 구매해두길 참 잘했지 싶다. 수학과련 저서나 수학철학 책을 읽을 때마다 몇 번이고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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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재: 과학철학 입문
피터 고프리스미스 지음, 한상기 옮김 / 서광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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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하게 내용 측면에서는 원서에 대한 평가와 차별되게 할 말이 없지만 조잡하고 성급해보이는 직역 및 오역들이 매끄러운 이해를 상당히 방해하기에, 이 책 고유의 특성을 전략적이고 능숙하게 활용할 계제가 아닌 바에야 통상적인 독자층에게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역본이다. 다뤄지는 주제 자체의 난이도를 차치하자면, 원서는 평이하고 깔끔한 문체로 쓰여서 글을 읽는 일 자체는 분명 괴롭지 않았다. 일부러 원서를 읽은 후 바로 이 역본을 읽어보았는데, 원문이 아무리 말끔하더라도 다른 언어로 조잡하게 직역될 경우 글의 질과 전달력이 상당히 저하될 수 있음을 몸소 확인한 독서가 되었을 뿐이다. 


2. 직역으로 인한 번잡함 뿐만 아니라 오역의 문제도 간혹 눈에 띄었다. 부러 의식적으로 세세히 비교해보며 읽은 게 아닌데도, 잘못된 번역이 맥락에 따라서는 현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령 다음을 보자:


   콰인이 유명한 은유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이론이 "법인체로서의 … 감각 경험의 법정에 직면한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74-5쪽)


콰인 철학을 알고 있다면 바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바로 원문을 확인해보았다:


  Quine said in a famous metaphor, that our theories "face the tribunal of sense-data … as a corporate body". (32쪽)


"as a corporate body"라는 구가 수식하는 표현은 "sense-data"가 아니라 "our theories"이다. 콰인식 전체론에 따르면 "감각경험의 법정"에 출두하여 판결받아야 하는 대상은 이론을 구성하는 개별 부분이나 명제가 아니라 "법인체로서의" 이론 전체이다. 굳이 콰인철학을 모르더라도, 위 번역문은 은유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게끔 번역되었다고 여겨진다. 어떤 "법인체"로서의 "법정"이라는 은유는 이상하다. 우리는 보통 법정을 '법인체'라 칭하지는 않는다.

 쿤에 관한 장에서도 눈에 띄는 오역이 있었다:


  과학자들에 의해 자연에 집어넣도록 강요된 "개념 상자들"  에 대한 쿤의 끈임없는 강조. (154쪽)


오래 전 쿤의 "구조"를 읽다 퍽 인상깊어서 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구절이기에, 사소하지만 잘못된 번역임을 바로 식별할 수 있었다. 원문은 이렇다:


  "Kuhn's constant emphasis on (中略) "the conceptual boxes" that nature gets forced into by scientists  (79쪽)


까치글방에서 나온 역본(김명자 譯, 1999, 초판. 내가 알기로는 이 역본도 번역이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긴 하지만)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자연을 전문 교육에 의해서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격렬하고 헌신적인 시도 (26쪽, '서론: 역사의 역할')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짜여지고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넣은 시도 (50쪽, '3장, 정상과학의 성격')


"that nature gets forced into"가 "the conceptual boxes"를 수식하는데, 마지막 전치사 "into"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 상자"에 "자연"이 "집어넣"어지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굳이 1차문헌을 읽어본 게 아니더라도, 번역문은 은유로서도 무의미하게 번역된 것처럼 여겨진다. 과학자들이 "개념 상자들"을 "자연에 집어넣"는다는 은유는 기이하다. 보통은 '상자에 무언가를 집어넣는다'라고 말해지지 '상자를 무언가에 밀어넣는다'고 말해지진 않는다.


3. 입문자라면 전체론 논의나 쿤의 정상과학 개념에 관한 논의를 어떻게든 따라가다가도, 이런 기이한 문장들을 마주치면 주춤할 것이다. 그냥 은유적인 맥락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원문은 명료한데도) 책 전체가 이런 식으로 번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투로 직역 및 오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념 상자들" 사례의 경우 한참 나중의 316쪽에서는 어째 "우리는 자연을 "상자들"에 "강제로 넣으려" 하지만, 자연은 저항한다."와 같이 제대로 번역되어 있다. 이로 미뤄보건대 초벌 번역만 한 뒤, 시간 탓인지 다른 이유 탓인지 세세한 검토나 교열을 거치지 못한 채로 급하게 출간된 듯하다. 허나 출판과정에 무슨 사정이 있었든 그것은 독자가 용인해줘야 할 사안이 아니다. 논문이든 단행본이든 여하한 산업전반이든, 학자와 전문가들이 여유 있는 호흡으로 책입감 있게 양질의 결과물들을 도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여하간 초두에 말했듯 번역 문제를 감내하고서라도 이 책 고유의 특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게 아닌 바에야, 여타 과학철학책을 읽거나 아니면 굳이 이 책이어야 한다면 과감하게 원서를 선택하길 권하고 싶다. 이 역본을 일별이나마 해보기로 결정했다면 구매하지 말고 빌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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