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꿈을 꿨는데,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작은아버지 아버지 당신 넷이서, 따뜻한 모래밭에 전부 깨벗고 앉아 서로 막 모래장난질을 하던 꿈이었다고 한다 그 광경이 너무 좋고 애틋해서, 꿈에서도 펑펑 울었고 깨어서도 보니 펑펑 울고 있었더랜다 그러고 나니 잠이 오질 않아 전활 한 거였다 얘길 들어보면 누나한테도 전화했는데 누나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으니 로또를 사라 했단다 아빠는 나랑 통화한 뒤로 로또는 제쳐두고 옛날 일기장을 들춰보았는지 몇 십 분 있다가 할아버지 돌아가시던 즈음에 쓴 일기들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다 납품할 물건들을 정리하다 말고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향년 49세, 아빠 일기장에 쓰인 대로 ‘시간이 휘두르는 낫‘에 할아버지 명숨은 너무도 일찍 버히었다 하는 사업마다 허탕을 치곤 했던 할아버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끊기기가 일쑤였던 할아버지, 어쩌다 영월에 돌아오시면 술이나 한 잔 하시고 곯아떨어지셨다던 할아버지, 글씨는 아빠처럼 멋져서 마을에서 공문서 같은 것 대필해주곤 하셨다던 할아버지, 나어린 시절 아빠가 할아버지 따라 장에 다녀오다가 세발자전거 보고는 저거 타보고 싶다 하면, 한 번 타보라 하시고는 가게 마당 휭 한 번 돌면은 ‘이제 타봤으니 가자‘ 하시곤 아빠 손을 잡고 그대로 집으로 오셨다던 할아버지ㅡ그런 아버지여도 아빠는 자기 아버지가 좋았다던 할아버지였다 열너덧 나이에 상경했던 아빠가 청계천 우주표가방에서 점원으로 일할 제 약값 하시라고 6만 원을 보낸 게 오월 칠일인데, 할아버지는 그 약값을 써보지도 못하고 이틀 뒤 구일에 명을 달리하셨다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하나 있는 남동생은 먼 타국 싸우디에 가 있는 채로, 부엌 바닥에서 혼자 식어갔을 할아버지가 당신은 그렇게 가엾고 서럽고 죄스럽다고 일기장에 쓰여있다 그렇게 영월 연당서 아득바득 살다 흩어졌던 네 식구가 꿈에라도 따뜻한 모래밭에 다시 모여 앉았으니, 아빠는 얼마나 기쁘고 슬프고 한스럽고 가슴이 북받쳤을까 소천하신 날자로 한달이 지난 초여름 유월, 벌써부터도 이리 더운데 할아버지는 어디서 머릴 뉘이고 계실까 거기가 어디든, 촉촉한 바람 기분 좋게 부는 대추나무 한 그루 아래서, 증조할머니랑 마주 앉아 시원한 메밀막국수라도 한 그릇씩 말아드시고 계시면, 아빠도 할아버지도 참 좋을 거 같다
출근하자마자 가공기는 부장님이 혼자 돌린다 하여 나는 납품이 급한 것부터 검수하러 중앙창고로 갔다 아빠 카톡에 일기장을 읽던 때는 아무렇지 않던 것이, 박스들 들고 와 앉아 검수를 하기 시작하자 별안간 눈물이 막 났다 추스리고 검수하려는데도 자꾸 울음이 나서, 검수품에 떨어진 눈물을 자꾸 닦았다
- 21.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