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이전이나 이후의 것을 찾는 이들이 있다 게 무엇이든 우리게 이해될 수 있으려면 종내 언어적일 수밖에 없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아온 명판도 언어로 쓰였을진대, 우리에게 말 걸 수 없으면서 전능하고 전지하고 편재한 존재자는 최소한 우리가 통상 표상하는 바로서의 신은 아닌 괴물에 불과하다 이를 암묵적으로라도 알았던 칸트는 신이 존재<한다>를 증명한 게 아니라 신이 존재<해야> 도덕과 자유와 인간이성이 의미있음을 증명하였다 무릇 칸트의 언어에서 ‘도덕‘을 일괄적으로 ‘삶‘으로 치환하여 이해해보자 이에 우리가 추론으로 그 존재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신의 존재근거는 도리어 우리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는 데에 존립한다 (우리의 추론이 증명해주는 바는 신을 거쳐 우리일 뿐인가? 우리 언어가 거치는 신은 우리인가?) 우리는 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언어로 신을 찬양할 수도 있는 반면, 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밖에는 우리게 말을 걸 수가 없다 이 점에서 인간 언어의 구조는 신의 것보다 풍부하다 이제 스피노자 명제는 언어적으로 전도된다ㅡ우리의 언어 중 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의 의미론 내로 한정된다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경계선 내외도 전환된다ㅡ세계의 의미가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언어가 세계 안에서만 의미론을 획득한다


나는 이제 시인과 형이상학자의 차이를 알 것 같다
두 외연에서 내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이유 역시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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