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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 관해 생각하기 - 수학 철학
Stewart Shapiro 지음, 이기돈 옮김 / 교우사(교재) / 2022년 4월
평점 :
살짝 아쉬운 데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수학철학 전문교재이다. 4부 구성으로 각 부마다 수학철학적 논점들과 예비사항, 현대 이전의 수학철학사,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고전적인 수학철학, 동시대의 관점 등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다. 각 이론이나 관점의 핵심을 명료하게 정리 및 해설하고, 종종 1차문헌을 인용하면서 저자 나름의 해석이나 평가를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 제시하며, 적절한 대목에서는 논의되는 이론에 제기될 법한 다소 공인된 비판점,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 등을 제언하기도 하는 등, 실속있는 내용들을 깔끔한 형식을 갖춰 전달하고 있는바 정통적이고 견실한 수학철학 교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야가 워낙 전문적이고 어려운 탓이라 수학철학은 고사하고 수학과 철학 양자에 완연 문외한인 초보자가 무턱대고 입문서로 읽기엔 조금 벅찰 듯하면서도, 이 분야에 강한 흥미와 관심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야 끈질기게 붙들다 보면 나름 읽어나갈 수도 있는 정도의 난이도이다. 대략 비슷한 분량과 성격의 책으로 S. 쾨르너의 "수학철학"이 번역되어 있는데, 난이도와 질적인 면에서 그 책보다 읽기 수월하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1960년대 이후 대두된 비교적 동시대의 관점도 소개하고 있기에 거진 60년 전에 저술된 쾨르너의 책에 비해 양적인 측면에서도 읽는 소득이 많다는 점에서, 그 책보다 훨씬 추천될 법하다. (재미있는 점은 쾨르너 책의 역자 최원배가 책 말미의 역자 후기에서 비교적 최근의 수학철학 동향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이 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쾨르너의 책을 처음 읽을 적엔 눈에 두질 않았는데, 이제사 보니 그런 식으로라도 언급될 법한 좋은 책이었던 셈이다) 이 책으로 입문한 뒤 쾨르너의 책으로 심화시키는 것도 괜찮겠다. (나도 그 책을 찬찬히 재독해보아야겠다)
번역에는 아쉬움과 만족스러움이 공존한다. 분명 직역투로 번역된 듯한데도, 직역된 철학서들이 으레 보여주는 바와는 달리 형편없고 성실하지 않은 스타일의 직역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하여 집중하며 읽었다기보다는 평소 독서하는 속도대로 편히 읽어나갔는데도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원서가 원체 지닌 탁월함에, 좋은 책을 소개하려는 역자의 노력이 더해졌기에, 직역투인데도 읽을 만한 물건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아쉬운 점으로는, 역자가 순수 수학계에만 종사해온 학자여서 그런지 철학계의 번역용례에 대한 참고가 부족한 듯한 역어선택이 간혹 눈에 띈다는 점이다. 콰인의 전체론적 관점을 특징짓는 데에 으레 쓰이는 'holistic'을 '전일적'으로 번역한다든가, 논증의 순환성이 논의되는 맥락에서 'regress'를 '퇴행'이 아니라 '회귀'로, 양상성 개념이 연루된 맥락에서 'possibly'를 '가능적으로'가 아니라 '아마도'로, 논리학 내지 형식언어에 대한 논의에서 말해지는 'domain of discourse'를 으레통용되는 '논의영역'이 아니라 '담화의 영역'으로 번역하는 식이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reference'를 '참조'로 번역한 것이었다. 수학철학이 인식론, 형이상학, 논리학, 언어철학 등의 이론철학 분야와 밀접하기에, 책 전반에 걸쳐 'reference'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참조'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는 맥락상 'reference'의 역어인 듯한데, 괄호 안에 영단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았다. 혹여 잘못된 추측일까 싶었지만, 307쪽에 가서야 원단어가 'reference'임을 알 수 있었다. 언어철학에서의 지시론적 의미론 및 지시개념의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의의를 정확히 숙지하고 있다면 이 단어를 결코 '참조'로 번역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굳이 이런 전문적인 사안을 떠나서라도, 가령 "철학자는 수학명제를 수학적 대상에 대한 참조를 포함하지 않도록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34쪽)와 같은 문장을 입문자가 읽을 경우, '어떤 명재가 어떤 대상을 참조한다'는 말이 도시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일상언어에서 '참조'라는 단어의 쓰임새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이 문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책 말이의 색인사항에서 '참조' 항목에 표시된 쪽수와 실제로 그 단어가 등장하는 쪽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목록에 제시된 쪽수에 단어가 없거나 그 전후 쪽에 있다든가, 단어가 실제로 등장하는데도 쪽수가 목록에 없다든가 등). 이 책이 학술적, 교육적으로 유용한 저술의 모습을 갖추도록 도모하고자 한다면, 지적된 것들이 다소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긴 해도 분명 개선되어야 할 사항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가뜩이나 출간된 저서 수가 희소한 이 분야에서 신간이 나왔다는 일 자체도 신나는 일이었다. 보자마자 어머 이건 꼭 사야해 하며 숙고 없이 무턱대고 샀는데, 결코 후회스럽지 않은 양질의 저서였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여하간 수학철학을 알아가고 싶은 그 누구에게들 주저치 않고 강하게 추천해주고 싶은 좋은 책이다.
사족: H. 퍼트넘과 P.베나세랍이 편집한 "수학철학"(1983, 2nd ed: 박세희 譯, 아카넷, 2002.)을 열심히 읽은 일이 있는데, 최근에 그저 생각이 나 큰맘 먹고 재독하였다. 다 읽고 나서 수학철학 분야의 신간이 혹시 있나 물색하던 중 이 책을 알게 되어 읽게 되었다. 읽고 보니 이 책에서 주로 인용 및 해설되는(혹은 그 핵심이 짧고 간략하게나마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각 철학자들의 주요 1차 문헌들이, 공교롭게도 퍼트넘과 베나세랍의 책에 대부분 실려 있는 것들*이어서 매우 반가웠다. 해서 이 책의 인용부분 전후 맥락을 그 책에서 살펴보기도 하고, 이 책에 제시된 해설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보고자 그 책에서 원글을 빠르게 통독해보기도 하고, 역으로 원글에서 어려웠거나 막연하게만 파악했던 부분을 이 책을 통해 좀 더 명료하게 해석해보기도 하는 등, 이 책과 그 책 양방향으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절판되기도 했고 번역이 아주 좋지 않긴 하지만, 이 책을 각잡고 제대로 읽어보고자 다짐한 사람은 퍼트넘과 베나세랍의 책을 곁에 두고 병행하여 활용한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R. 카르납, '수학의 논리주의적 기초', 수학기초론 심포지엄 중 1; '경험론, 의미론, 존재론'("의미와 필연성").
A. 하이팅, '수학의 직관주의적 기초', 상동 2.
J. 폰 노이만, '수학의 형식주의적 기초', 상동3.
L. 브라우어, '직관주의와 형식주의'; '지각, 철학, 수학'.
M. 더밋, '직관주의 논리의 철학적 근거'.
G. 프레게, "산수의 기초"(발췌).
B. 러셀, "수학철학 입문"(발췌).
D. 힐베르트, '무한에 관하여'.
H. 커리, '수학의 정의와 본질에 관한 논평'.
G. 크라이셀, '힐베르트 프로그램'.
P. 베르나이스, '수학에서의 플라톤주의에 관하여'.
P. 베나세랍, '수가 될 수 없는 것들': '수학적 진리'.
H. 퍼트넘, '기초가 없는 수학'; '모형들과 실재'.
A. J .에이어, "언어, 진리, 논리"(발췌).
W. V. 콰인, '규약에 의한 진리'.
H. 푸앵까레, '수학적 추론의 본질에 관하여'("과학과 가설")
C. 괴델, '러셀의 수리논리학'; '칸토어의 연속체 문제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