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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현대미술 - 동시대 미술의 지도 그리기
피터 R. 칼브 지음, 배혜정 옮김 / 미진사 / 2020년 12월
평점 :
풍부하고 다양성 있지만 텍스트로서는 구심점이 없고 산만하게 여겨지는 책이다 ˝동시대 미술의 지도 그리기˝라는 부제에서 ‘지도‘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주류 미술계나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메이저 작가나 작품들만 주목하는 게 아니라,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외연의 국가 문화 인종 계층에 속한 작가군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에 큰 비중을 둔다 작가들 활동의 방향성이나 작품의 주제 및 형식 면애서도 다양성이 돋보이는바, 갤러리나 전시관에서 향유되는 주류 주제나 형태를 지닌 작품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식 하에서 제작된 논쟁적 작품이라든가 관객 참여적인 프로세스아트 행위예술 설치작품 장기프로젝트 형태의 작품들 등을 폭넓게 아울러 소개한다
하지만 이 모든 풍부하고 다채로운 내용들이 뚜렷한 중심점이나 일이관지한 해석관 없이 책 전반에 걸쳐 그저 일화적이고 백과사전적으로 나열되는 식이어서, 솔직히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았다 종종 차용되는 현대 대륙철학이나 포스트모던 담론도 다소 파편적이고 비맥락적이기에 선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외려 이해와 몰입에 방해만 될 공산이 크다고 여겨졌다 80년대 이후 전개되어온 동시대 미술이 미술사적으로 견실하고 명확하게 평가가 완료된 분야가 아니라는 데에서 기인하는 불가피한 특성임을 감안해야갰지만, 어쨌든 학술적으로든 교양 차원으로서든 선뜻 읽어보라 추천하기는 망설여지는 텍스트이다 리포트 작성이나 발표 등 실용적인 특정 목적을 염두에 둔 채 풍부한 사례를 건져낼 자료가 필요하다면 일독을 고려해 봄직하겠다
사족. 오랜 기간 많은 책들을 읽어왔다 자부하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무릇 독서의 즐거움이랄 게 주제보다는 텍스트 자체에서 오는 경우가 갈수록 더 많은 듯하다 암만 내가 관심하고 기대하는 분야의 책이어도 서술이 지리멸렬하거나 문장력이 형편없다면 읽는 일 자체가 고되고 지겹기만 해진다 반면 여하한 관심이 일절 없는 분야더라도 글 자체로서는 매끄럽고 능숙하게 잘 마물러진 텍스트를 우연히 접하면, 나도 모르는 새 흡인되어 흥미가 더해지며 읽어내려가게 된다 이를 좀 더 넓혀보자면, 세계에 대한 흥미의 원천은 주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주제물이 우리 인식에 제시되는 방식이나 틀에 있는 법이다 주제물은 그냥 세계에 존재한다 막연히 있는 존재에 흥미를 느끼는 인식이란, 지극히 철저하게 사유하는 존재론자가 아닌 바에야 일반적으로는 드문 일이다 어떤 분야나 주제가 되었든 그것이 인식의 관심을 환기하는 기제는 특정 제시방식이나 표상방식에 달린 문제이다 텍스트든 이론이든 이미지든 허구적 이야기든, 모든 표상방식에는 그 나름의 온전성이나 탁월성에 대한 평가 기준이 막연하게나마 있을 것이다 그 막연함을 조금씩이라도 갈무리해 명확함으로 바꿔가는 것이, 인간의 그 모든 다양한 인지적 활동이 목적하는 바들 중 일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세계에 대한 흥미는 세계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표상방식과 그 유한성에서 온다 신은 세계를 재밌어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