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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평점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돌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곰곰히 생각할수록, 한 번, 두 번 경험의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남자보다 여자가 더 삭막한 존재가 아닐까 한다.
절대 내가 남자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주의, 외모보다 돈, 돈보다 능력 등, 여자들에게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매우 현실적인 말들에 뭔가 억울함을 느끼는 남자들의 이야기들을 겪고 보고 들어왔던 나, 그럴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은 편치않았던 나의 반응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렇기에 이번 '그린 핑거'의 극히 현실적인 연애 이야기를 보면서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이 책, '그린 핑거'의 총 7개의 소설 중에서,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이라는 부제로 묶인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각각 한 편의 소설로서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주인공들이 겹치고 또 연결되며 몇 쌍의 성공한, 혹은 실패한 사랑 이야기들을 다룬다. 한 편의 주인공이었던 남녀의 그 사건 전후의 이야기를 다른 소설에서 펼치고, 그 주인공들이 서로 섞이고 하는 식의 구성을 취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들의 연애는 그야말로 '실리'다. 특히 여주인공들의 심리적 묘사 속에는 감정이 없다. 아니 감정은 있으되 그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는 감성이 아닌 철저한 이성이다. 그런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이 개인적으로는 참 속쓰리다. 분명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그러고보면 나도 최근 여성들에게 들은 사랑 이야기들은 극히 현실적인 것들이 많기도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라는 아쉬움이 드는 그런 속쓰림이 밀려왔다.
그런 실리 위주의 연애관을 가진 여성들과 극한의 대비를 이루는 것이 주인공 중 하나인 우인이다. 자기 몸을 희생해가며 인류애를 실천하는 듯한,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그런 주인공. 김윤영의 무채색인 이성적 연애관의 세계 속에서는 더욱 이질적인 이런 인문들과의 대비 속에서 그 속쓰림은 극에 달한다.
게다가 그런 다섯 작품이 얽혀있는 짜임새는 또 얼마나 대단한지. 작가 김윤영의 뛰어난 구성력과 역량이 돋보이는 그런 부분이며 물론 스토리적인 재미도 좋고.
그리고 표제작이며 책의 시작을 장식하는 '그린 핑거'와 '전망 좋은 집'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컴플렉스를 가진 여성들, 하지만 내적인 것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점점 심화되는 컴플렉스를 가진 그녀들의 모습을 그린 이 두 작품 역시 재미있으며 또 그녀만의 강한 색깔을 낸다. 물론 기존에도 이런 식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담은 소설들이 꽤 있어왔지만, 대부분의 중점은 자기 내부의 뛰어난 감정 묘사나 사적인 것에 집중되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을 기반으로 타인의 시점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인 문제, 자본주의적 욕망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리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시선이며, 또 그렇기에 평론가들은 '여성문학 이후의 여성문학'이라 평할 정도이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적 언급을 차처하더라도 세상은 점점,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바쳤던 이덕화식의 감성보다 '사랑은 화학적 호르몬의 작용이다'라는 이성적인 판단의 '리얼' 러브 스토리들이 채워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 김윤영이 이 책에 담고 있는 '그런 리얼 러브 스토리들이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에 의한 이성적 판단을 꼬집고 비판하기 위해 씌여졌는지, 아니면 '뭘 어때?! 그게 세태니 인정해야지!'라는 것인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나같은 로맨티스트(라 주장하는)가 가질 동병상련적 속쓰림을 이끌어내거나, 혹은 현실적이다.. 라고 말할 만큼이나 '이게 세태야'라고 말할 그녀(혹은 그)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이 작품들이 그런 방향성을 넘어선 재미와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렇기에 속쓰린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녀의 소설이라면 적어도 먼저 읽을 우선순위로 올려놓을 것 같은 그런 충분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