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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오영욱 지음 / 샘터사 / 2005년 5월
평점 :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한 단계쯤 벗겨놓는다. 누구나 갖고 있을 마음의 껍질. 그 겹겹이 보호된 마음의 껍질은 상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똑같은 빛도 그 껍질의 두께에 따라, 그리고 그 껍질의 재질에 따라 자신만의 편광된 빛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그저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뭔가 아찔함이 묻어나오는 이 존재는, 그런 마음의 껍질을 조금은 벗겨놓는다. 덕분에 평소에는 하찮게 치부해버렸을 것들도 마음의 울림이 되고, 크게 인상에 남는다.
그렇기에, 여행자는 누구나 감성적이 된다. 시인이 된다. 또는 화가가 된다.
혹시 당신이 여행 후 남겨놓은 글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자. 일상 생활 속에서 썼던 글들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평소의 편광되었던 마음의 투영과는 조금 다른 빛깔을 느낄 수 있을 게다. 당신의 글 속에서. 그리고 사진이라면 당신의 얼굴 표정에서.
이 책은 그런 여행의 감성적인 측면을 참 강렬하게도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건축가의 길을 걷는 오영욱이라는 작가는, 자신의 감성의 바다가 자아낸 여러 감정의 편린들을 쏟아내었고, 그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모여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라는 책은 완성되었다. 그 덕분에 이 책 안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 남미와 유럽을 넘나드는 여러 나라들은 실제 그 나라의 느낌이라기 보다는, 오영욱이라는 한 사람의 감성 속의 나라. 그가 만들어낸 약간은 몽환적인, 그리고 매우 감성적인 그런 곳들.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는 그런 장소같은 인상을 받는다. 기묘한, 그러나 아름다운.
그리고 그런 인상을 받게 하는 가장 큰 촉진제가 바로 '그림'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럽다. 여행지에서의 감성 200%의 상태,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신만의 감정을 그 광경에 더할 수 있다는 것은, 사진이 할 수 없는 그림만의 축복이다. 저 멀리 칠레에서, 그리고 이스터 섬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한 자리를 차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격정이 느껴졌을까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또 다시 그 격정 속에 빠져들 것을 생각하면. 또한, 그림이기에 사람들에게 훨씬 더, 그가 말하려던 감정이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효과도 훨씬 크다. 당장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도 그 어떤 다른 여행기(이 책이 과연 여행기일까...라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보다 훨씬 감정적인 전달이 쉬웠으니 말이다. 적어도 작가의 바람 하나는 확실히 이뤄진 듯 하다. '나의 스케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나보다'라는 작가의 말 하나만큼은.
그리고, 더불어 편집에 힘썼을 편집자에게도 갈채를 보내고 싶다. 종이색의 변화, 색의 반전, 사진과 글의 레이아웃 등에 여러 가지 시도와 노력을 기울였다는 흔적이 철철 넘치는 이 책은, 그 덕분에 훨씬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데 성공했다. 작가의 의도와 원하는 느낌을 잘 살려주는 것.을 편집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적어도 편집에는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 젊은이의 한 사람으로서, 1년이라는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시간동안 여행을 갈 수 있는,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수많은 감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그가 부럽기 그지 없다. 과연 나에게 이런 여행의 기회가 생겼을 때 선뜻 갈 수 있었을까. 내 머릿속을 이미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집착과 이미 익숙해져버린 삶을 모두 제쳐두고 이렇게 훌쩍 떠날 수 있었을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부러움은 진짜다. 그리고 이런 부러움은, 적어도 내 또래의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거라는 것은 확신한다. 그렇기에 더욱 이 책이 내 마음의 한 구석을 건드린다. 그리고 마음을 한 두 겹쯤 벗겨낸다. 마치 여행을 떠났을 때처럼. 여행을 가지 않고도 여행지에서같은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