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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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여러 작가가 나누어 쓴 것을 하나로 만들거나 한 작가가 같은 주인공의 단편 소설을 여러 편 써서 하나로 만든 소설'
하지만 이런 사전적 의미로는 분명 말할 수 없었다. 이 '채식주의자'라는 연작소설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개의 중편소설은 작가 한강이 2002년부터 2005년에 걸쳐 쓴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매된 '채식주의자'는 이 세 편을 모아 발매된 책이고.
그 런데, 이 세 개의 소설, 각각의 소설로서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실제로 '몽고반점'의 경우는 2005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할 정도로), 세 소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교묘하고 치밀하게 얽혀있어 그 흡인력이 대단했다.

첫 작품이었던 '채식주의자'. 평온한 부부 생활을 하고 있던 영혜는 어느 날 악몽을 계기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육식을 피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육식을 강요하면서 사태는 심각해지고 영혜는 자살시도를 할 정도가 된다. '새로운' 자신을 지키려는 그녀와 '예전의' 그녀를 강요하는 주위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그녀를 이해하지 못 하는 남편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두 번째 작품인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한 남자가 화자가 된다. 영혜의 자살 시도 이후 몇 년간 작품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부인으로부터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욕망으로 괴로워한다. 남성적인 욕망인지 혹은 예술혼인 것인지 혹은 식물적인 태초적 매력에 대한 향수인지 알지 못 한 채. 그리고 그 욕망에 못 이긴 그는 결국 영혜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린 채 교합하고 그 영상을 비디오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동생이 벌인 그 현장을 목격한다.
세 번째 작품인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선. 남편을 잃고 정신병자가 된 동생을 간병해야 하는 살아남은 자의 아픔 속에서 인혜는 영혜에 대한 동질감과 괴리감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나무가 되겠다'는 영혜를 보고 있어야 하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언니의 입장, 가족의 파국을 어떻게 하지 못 했던 딸이나 아내의 입장, 아들이라는 미련이 남지 않았으면 자신도 무너졌을지 모른다는 어머니의 입장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그저, 여러 명의 시선으로 볼 뿐인 시리즈 소설의 하나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으면 분명 이 '연작' 소설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뿌리가 서로 얽혀있는 세 그루의 나무같은 느낌이랄까.
어린 딸의 다리를 문 개를 오토바이에 묶어 끌고다니다 죽인 것은 아버지에게는 부정의 실천이었으나 영헤에게는 육식거부로 이어진다거나, 아버지의 육식 강요에서 이어진 영혜의 자살 기도는 영혜의 남편에게는 그저 끔찍한 장면일 뿐이지만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뛰었던 형부에게는 자신의 작품 세계 자체가 송두리째 변하는 변혁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가장 잘 아는 언니 인혜에게는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운 기억인 등, 세 연작 소설속에 고루 뿌려진 다양한 씨앗들은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과 느낌을 세 연작 소설을 모두 읽었을 때여야 수확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어쩌면 추악하고 어쩌면 아름다울 수 있는 얽힌 욕망들을 다룬 '채식주의자'는 저자인 한강의 식물적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녀의 담담하면서도 현실적인, 그러면서도 극히 시적인 서술 속에서 큰 매력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도 단번에 세 편을 읽어버릴 정도로 높은 흡인력을 갖고 있었고, 왠지 찜찜한 느낌(개인적으로 별로 선호하지 않는) 속에서도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한국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생 각해보면 나 자신도 '한국 현대 문학'에 갖고 있는 선입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약간은 정적이고 약간은 굳어있는 그런 느낌.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의 것들보다는 외국 문학을 많이 읽으며 자라왔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서 '수능'이니 '논술'이니를 위해서, 혹은 교과서 등을 통해서 읽어왔던 '고전'을 제외한다면, 외국문학과 비교해서 정말 처절하게 적게 읽었다는 느낌이랄까.
그 래서 부끄럽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책이 이 '채식주의자'다. 물론 적게 읽긴 했지만 그간 읽어온 국내 현대 문학중 훌륭한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삼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것이 이 작품이었던 것은 왜일까. 그녀의 식물적 상상력 때문이었을까. 혹은 연작 소설로서의 기대 이상의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상문학상' 수상작이 갖는 특별한 색채 때문이었을까?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그 자체가 나에겐 더 없이 소중한 경험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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