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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학기 ㅣ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오싹함 속에서 읽은 한 권의 책.
감금과 공포, 그리고 의문 속에서 1년여라는 시간을 보낸 한 여자아이의 삶.
그것 자체로도 충격적이지만 작가 '기리노 가쓰오'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 후'.
그런 여자아이와 그 주위 인물들이 주위의 추악한 상상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고리 안에서 자신만의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환상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감정, 마음을 발견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그 그림이 어쩌면 이렇게도 모호하고, 또 솔직하며 치밀한 것일까.
사실 '잔학기'는 개인적으로 기리노 나쓰오라는 작가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아주 좋아하는 광서방에게 '여성 하드보일드의 귀재'라는 그녀의 꼬리표는 꽤 매력적이었지만 왠지 일본풍의 '기분 나쁜' 잔혹함이 조금 꺼려졌달까. 분명 피가 더 튀거나 더 충격적인 사건이라거나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내면을 좀 더 솔직하게 그려내는 일본 풍의 잔혹함은 개인적으로 조금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잔학기 역시 그런 잔혹함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하지만, 잔학기에는 '범죄 소설', 혹은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작가 자신조차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아니 파악하려 하지 않는 등장인물의 모호함, 그리고 그런 모호함들이 서로 섞이면서 벌어지는 감정의 파도가 아주 무심하게 흐른다.
작가와 소설 속의 인물들의 넘쳐나는 열정, 혹은 광기가 무심하게 서술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차가워 보이는 치밀함 속에서 '잔학기'는 자신만의 독특함과 생명력을 갖는다. 번역자인 김수현씨가 밝혔던 '창조에 앞선 관찰자의 시선'이란 표현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수많은 소설 속에서 참 수많은 충격적인 소재들을 보아왔다. 어쩌면 '어린이 유괴 감금'이라는 이 소재 역시 그 소재만으로는 이제 식상할지도 모르겠다. 차갑게 들리겠지만. 하지만 기리노 나쓰오라는 걸출한 작가의 '잔학기' 속에서 그 소재는 오히려 소재보다 더 큰 무게로 피어난다. 그렇기에 기리노 나쓰오의 다른 책들을 벌써 펴들고 있고. 앞서 말했듯 이런 느낌의 소설들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