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해 생각합니다.

멀리 떠나는 것이 여행일까요? 해외 출장은 어떤 형태일지 모르지만 비즈니스 미팅을 우선으로 해, 사전에 일정과 묵을 곳 등을 정하고 간다면 대체로 그 나라에 대해서 제한적인 경험을 할 겁니다. 패키지로 가는 여행도 진정한 여행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맞지만 보는 것과 먹는 것 등이 다를 뿐, 약자로서의 경험은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거주지에서 산다는 것은 평소에 무게중심이 꽤 분산된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디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야하고, 교통카드가 있고, 등등을 익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주지가 있다면 짐을 모두 들고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이 있고, 이럴 때 가기 좋은 장소를 알고 있고,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를 보려면 어느 시간대, 어느 극장이 덜 붐비는지, 어떻게 하면 좋은 가격으로 표를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전시는 어디가 어떤 전시를 하고, 전시를 다 보기까지 대체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스스로를 약자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성경에 여행자들, 이방인들에게 잘 대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약자이기 때문일겁니다. 늘 짐을 많이 들고 다니는 노숙인들도 모든 무게중심을 떠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요즘의 여행은 사전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대체로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것,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찾거나 번역을 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무게중심을 일부 분산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분산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짐들은 맡길 데가 없어 끌고 메고 다녀야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차를 타야 하는지, 몇 번을 타야 하는지, 목적지는 오늘 쉬는지 안 쉬는지, 지금은 어떤 과일이 맛있는지, 어디 과일이 맛있는지 등등 모든 사소하고 별일 아니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처음 배우듯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여행과 패키지는 입장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편하고 안전하다는 이유로 패키지를 선택하지만, 그로 인해 여행에서 날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버리는 셈입니다.

기업의 총수들, C레벨들도 이런 여행을 다녀보기를 권합니다. 누군가 다 정해준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장소만 옮겨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일 뿐, 그 나라의 교통체계가 어떤지, 유통 체계는 어떤지 등을 체험하기 어려운 만큼 또다시 추려진 정보만 접하게 될 뿐이니까요. 약자가 되면 모든 감각이 열리는, 동시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낯설고 무능력한 존재인가라는 한시적인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을 혹은 꽤 오랜동안 경험해보지 못했을 시간일겁니다.

* 옛날 임금들 중에 암행을 다녔던 이야가도 종종 듣습니다. 라이트노벨이 원작인 만화 <약사의 혼잣말>에는 환관으로 알려진 권세있는 인물이 저잣거리에 나갈 때, 저잣거리에서 살았던 궁녀가 지적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아무리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향기와 머릿결이 다르다는 겁니다.

* 몇 차례 현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이 나라가, 이 도시가 어떻게 체계를 갖추고 운영되는지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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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책 한권을 끝까지 보지 못합니다. 일책은 특히 더 그렇고, 개인 책도 그렇습니다.

읽다보면 흥미가 떨어져 자연스럽게 다른 데로 관심사가 옮겨가거나, 혹은 재미있지만 시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멈췄다가 읽고 있었다는 걸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읽으려고 챙겨둔 책을 잊는 건 종종 일어납니다.

어쩌다보니, 올해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다른 활동에 시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차분하게 카페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고, 이런 글귀 저런 글귀도 끄적거리는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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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은 하이닉스가 만든 개념이 아닙니다. AMD가 게임에서 그래픽의 한계를 넘기 위해 고안한 설계였죠. 당시에는 시장이 작아 돈이 안되는 기술이었습니다. 라인 투자 대비 수익조차 불확실했어요. 하지만 하이닉스에게는 기회가 됐습니다. AMD와 협업 자체가 전략적인 모멘텀이었기 때문입니다.
리사 수 AMD CEO와는 여러 아젠다를 공유했습니다. 저는 급성장하는 중국에서 GPU 시장을 뚫어보자고 리사 수 CEO에게 제안했습니다. 정치• 정책적 솔루션을 만들어 새 시장을 노려보자는 전략이었어요.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AMD가 가장 강력하게 밀었던 아젠다는 HBM 개발이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큰 수익을 내지는 못했지만 파트너사의 요구가 있었고 만약 시장이 생기면 먹힐 만한 기술이라는 판단은 있어서 개발을 이어갔습니다. AMD도 일정 수요를 유지해 줬습니다. HBM 개발이 죽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이 협력 관계도 동인이었죠.

- <최태원 노트: 우리는 길목에 서 있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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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CEO는 병목을 풀기 위해 ‘쿠다 CUDA‘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지만 AI 가속기의 퍼포먼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엔비디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병목이 두 가지 있습니다. HBM 칩과 패키지입니다. 칩도 스스로 개발할 수 있고, 패키지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복잡한 칩을 양산이 가능한 70% 이상의 수율로 만들어낼 수 없어요. HBM도 대역폭 성능과 수율을 동시에 맞춰야 합니다. 엔비디아 가속기의 두 병목을 없애는 건 아직까지는 하이닉스와 TSMC만이 해줄 수 있습니다.
셋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AI는 지금의 퍼포먼스를 낼 수 없었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이야기에요. AI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자리에 세 회사가 있었고, 솔루션을 만들었기에 AI 시장이 탄생했습니다. 박자가 서로 맞았고 모두 나름의 베네핏 benefit (이득)을 얻었습니다. 하이닉스가 해내지 못했다면 엔비디아도, TSMC도 지금의 위치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엔비디아는 2~3년에 걸쳐 칩을 개발하다가 이제는 추격이 불가능하도록 매년 새로운 칩을 내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데 그 속도로 따라와 줄 수 있는 회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이닉스-엔비디아-TSMC의 삼각 구도는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AI 기술이 워낙 빠르게 확장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글로벌 파트너십이 생겨나거나 협력의 폭을 넓힐 수도 있죠.

- <최태원 노트: 우리는 길목에 서 있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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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GPU 기반 병렬 연산 포지션을 먼저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AI의 시간이 오면서 완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죠. 젠슨 황 CEO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GPU 칩 하나가 아니라 AI 생태계 전체를 보고 있었스비다. AI 데이터센터부터 버티컬 AI까지 망라하는. 수년 째 만나고 협력하고 있는 젠슨 황 CEO는 미래를 보고, 읽고, 쓰는 사람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실행하고 있는 그림이 어떤 모습이지 예측할 수 없는 빅픽쳐 머신인 것 같습니다. 내가 본 적이 없는, 타이밍을 아는 탁월한 승부사이자 협상가라고 느꼈습니다.

- <최태원 노트: 우리는 길목에 서 있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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