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선택 작업을 수행한다. 서사의 궤도는 좁다. 오직 특정한 사건만 서사의 궤도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이로써 긍정적인 것의 마구잡이 증식과 대량화가 방지된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 기억 또한 그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 구별된다. 기억의 자취는 그 역사성 때문에 늘 재정리되고 수정되는 과정 속에 놓인다. 이와 반대로 저장된 데이터는 늘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기억은 긍정화되어 쓰레기와 데이터의 더미로, "고물가게"로, 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다량의 온갖 이미지와 닳아빠진 상징들이 완전히 뒤죽박죽 꽉 차 있는 창고"로 전락한다. 고물가게의 사물들은 차곡차곡 정돈되지 않고, 그저 나란히 널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가 없다. 고물가게는 기억도 망각도 하지 못한다.
- <가속사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