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77
이디스 워튼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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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대 뉴욕 유명 가문들의 점잖은 태도 속 위선과 그 되물림을 보여주는 이야기.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의 작품인데 상당히 예리하고 침착한 시선을 가져서 문장 하나하나 부대끼거나 귀찮은 부분이 없었다. 그리고 벌써 150년 가까이 된 소설인데 유머감각이 전혀 후지지 않고 파리하고 영리한 게 좋았다. 작가 이디스 워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하던데 문장에서도 품위와 오만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 아닌 여자였겠다 싶었다. 항상 고개를 조금 쳐들고 깔아보는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느낌. 좋아.

그 시기 뉴욕에서 가장 조신하고 아름다운 메이 웰렌드와 결혼은 바로 앞두고 있는 뉴랜드 아처에게 갑자기 나타난 엘렌 올렌스카. 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뉴욕 사회에서 파리에서 결혼한 후 별거를 하며 고향으로 돌아온 엘렌의 히스토리와 그녀의 패션, 가감없는 언변은 뉴욕 로얄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상하게 뉴랜드는 그런 엘렌이 자꾸 마음에 걸려.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자 메이와의 혼인을 서두르고 지루하게 평화로운 결혼 생활 중에도 엘렌에 대한 갈망은 커지기만해. 그리고 그 와중에 본인에 대한 엘렌의 마음도 알게되고 이제껏의 비겁함을 버리고 엘렌과 함께하겠다 마음을 먹은 그 날 메이의 임신사실을 알게 돼.

내리 아내가 아닌 한 여자에 대한 갈망을 그리고 있지만 어떤 부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메이의 인내가 있었고 정도를 지키고자 했던 뉴랜드의 책임감이 있었고 망가진 본인을 아껴준 주변인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고자하는 엘렌의 의리가 있었다. 세 등장인물 모두 이해되고 모두 안타까웠다.

여자든 남자든 본인의 의견을 본인의 목소리로 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고 장기전에서는 책임감과 인내심이 가장 큰 무기라는 걸 배웠다. 엘렌과 메이 훌륭한 두 여자에게서 좋은 것만 쏙쏙 뽑아 흡수하고 싶다.

줄거리도 인물들도 모두 납득이 갔는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세상의 타이트한 기준과 남 눈치보는 문화. 남의 시선이 다 뭐라고.... 지체높은 가문의 어머니 할머니 손녀까지 대대로 자연히 교육받은 규칙 아닌 규칙을 따르며 거기서 조금만 어긋나도 바로 서로의 눈을 보며 무언의 흉을 보는 그 분위기. 지금도 뭐 그리 달라졌나 싶다. 참 피곤하게 산다. 세상의 피곤은 여자가 만들어내는 것 같다. 어쩜 남 일에 관심이 저리도 많은지.

발췌

어떤 것이 세련되고 어떤 것이 세련되지 않은지 하는 것은 뉴랜드 아처가 사는 뉴욕에서는 수천 년 전 선조들의 운명을 지배한 불가사의한 토템 공포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벌판같이 넓은 얼굴 한가운데는 지난 시절 작은 얼굴의 흔적이 발굴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묻혀 있었다.


.....˝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그녀의 분위기에 깊이 매혹되어 있어서, 지금 그런 조언을 한다는 건 사마르칸트의 장미유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뉴욕의 겨울에는 방한 고무 덧신이 필수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움은 그 자신이 불신할 때조차 남자의 가슴에 신뢰를 일으키는 법이고,

사람들은 변화가 끝날 때까지 힘을 모아 그것을 무시하다가, 어느 순간 그 일은 이미 선대에 일어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거 알아요? 내가 자꾸만 당신을 잊는다는 거?˝
˝자꾸만 잊는다고요?˝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언제나 그래요. 당신을 만날 때마다 모든 게 완전히 새로워요.˝
˝그래요. 나도 알아요. 알아요!˝

˝당신은 내 평생에 가장 솔직한 여자예요!˝
˝그렇지 않아요. 법석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맞을 거예요.˝

그는 자신이 지독한 쳇바퀴 속에 틀어박혀 살았다는 걸 알았다. 의무를 다한 일의 최악의 결과는 그 어떤 다른 일도 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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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6-09-15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기전에서는 책임감과 인내심...진짜 공감되네요. 훌륭한 여자들의 이야기라서 읽으면서 자기혐오가 너무 심해질까봐 약간 걱정되네요.

Cindy.K 2016-09-15 17:55   좋아요 0 | URL
책임감과 인내심 세상에서 제일 부족한게 바로 저입니다 ㅋㅋㅋ 이렇게 살다간 시집 못갈듯요.. 추석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