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7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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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되게 읽고 싶었지만 이왕이면 여행지에서 읽으려고 아끼고 아껴둔 책이었는데 정작 사이판에서는 두 권 중 상의 3/4 밖에 못 읽고 노느라 미뤄두다가 오늘 점심에 끝냈다. 재미가 없어서는 절대 아니고 생각보다 하나하나 씹어 읽어야하는 글이었고, 다음 장 다음 장!을 외치게 되는 줄거리 위주 책이 아니었어서 좀 늘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이 표현 웃긴 듯. 끝까지 이어갈 수 있을 수 없지 않아 있지 않아 없지 않지만 있지).

탄생부터 유아기 어머니와 아버지 소개, 어린 시절의 기억, 그 때 받았던 교육과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 친구들과의 대화. 교육된 종교와 느끼는 종교, 크레타과 터키의 전쟁, 종족의 피, 나라, 재난, 그리스, 여행 등등등. 주인공의 영혼에 영향을 준 인생의 모든 사건과 기억을 함께 밟아간다. 그걸 보자니 나란 사람의 삶도 밟아나가면.... 특별할 것 없는 교육 과정을 밟고 평범한 가정에서 울고 웃으며 자라왔지만, 그걸 성인이 된 지금의 눈으로 하나하나 되짚어가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사건이고 역사겠구나 싶다. 그리고 모든 이의 삶이 각각 거대한 역사려니 싶다.

평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하고 내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없는 나로선 책에서 보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조상들의 삶의 태도가 언제나 신기했었어. `음, 대단하긴 한데 왜 저렇게까지....어떻게 저렇게까지....` 근데 크레타의 위기의 시기에 유년을 보낸 화자가 겪은 세상과 어른들의 대화 부모님의 교육을 보니 이해가 된다. 애국심, 희생, 울분, 자긍심 등등의 감정과 태도들은 학습되거나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시기에 속했기 때문에 갖게된 거구나. 우리 시대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냥 어린아이로 태어나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늙어 죽겠거니 싶더라. 말로만 어른, 머리로만 어른이고 심장은 성숙되지 못한. 과거 혼돈 속에 살다 일찍 죽은 청년의 절박함은 책이나 영화로나 상상해볼 뿐. 참 좋은 세상이다. 철없이 살다 가도 그만인 세상. 내 앞가림만 하면 되는 세상.

이제 스물 다섯의 역사까지 쫓아왔는데 영혼이 어떻게 여물지 기대 된다. 호들갑 없고 묵직하고 사소할 수 있는 고민들을 치열하게 하는 화자라 좋다. 얼른 퇴근하고 하 읽어야지. ​

발췌

손에는 항상 똑같은 선물인 솥에다 구워 레몬 잎사귀로 싼 젖먹이 돼지를 들고 왔다. 외할아버지가 꾸러미를 벗기면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했다. 외할아버지는 구운 돼지와 레몬 잎사귀와 완전히 하나여서, 그때부터 구운 돼지고기 냄새를 맡거나 레몬 과수원에 들어서기만 하면 내 머릿속에는 항상 생전의 유쾌한 외할아버지가 구운 새끼 돼지를 손에 들고 들어서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외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몸 속에서 외할아버지가 살아갈 터이기에 나는 기쁘다. 우리들은 함께 죽으리라. (중략)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덤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혔으니,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들도 계속해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사람을 평생 살게 하는 방법. 아픈 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위로가 됐다.​

집 밖에서는 신이 아직도 고함을 질렀다. 천둥이 더 심해졌고, 마을의 좁은 골목들은 강이 되었으며, 돌멩이들이 마구 웃어 대면서 굴러 내렸다. 신은 격류가 되어 대지를 껴안고, 물을 주고, 비옥하게 했다.

「현실은 바꿀 수가 없을 터이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꾸자.」 어렸을 때 나는 그랬고, 지금도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에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면, 그 시간에 나는 내 영혼이 성숙하는 과정을 틀림없이 보았으리라. 나는 몇 시간 사이에 갑자기 아이에서 어른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억압되고 불행한 숙명을 산다. 그것은 그가 맡은 일의 본질이 어휘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격렬한 흐름을 정체시켜야함을 뜻한다. 모든 어휘는 위대한 폭발적인 힘을 내포하는 견고한 껍질이다. 그 의미를 찾아내려면 인간은 내면에서 폭탄처럼 그것이 터지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안에 갇힌 영혼이 해방된다.

p126. 프랑스어 사전을 모두 그리스어로 바꾼 어린 화자를 본 두 신부의 다른 반응 에피소드. ˝넌 소년이냐, 아니면 늙은이냐? 왜 이런 노인의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지? 웃고 놀고 지나다니는 계집아이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는 대신, 망령 든 영감처럼 앉아서 사전을 번역하다니! 없어져 버려. 내 눈 앞에서 없어져! 이러다간 넌 절대로 영원히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되고 말거다! 넌 어깨가 축 늘어지고 안경을 쓴 초라한 선생이 되겠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고 난 다음 자유는 크레타 땅에 피투성이의 발을 디뎠다.

위기를 맞으면 항상 도피하는 문 노릇을 해온 웃음에 나는 또다시 의존했다.

젊음은 눈 멀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야수이다. 젊음은 먹이를 탐하지만 먹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발길에 채는 행복을 마음만 먹고 주우면 되는데도 줍지 않고, 샘터로 가서 시간이라는 물을 쓸데없이 흘러 말라 버리게 그냥 내버려 둔다. 스스로 야수인 줄을 모르는 야수ㅡ그것이 젊음이다.

건강하고도 보기 좋은 몸매에 과묵하고 피상적인 부유함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힘을 지녔지만 그 힘을 억누를 능력도 갖추고, 상상력을 제한할 줄 아는 사람. 소박함의 언저리에 다다른다. 하지만 경계선을 넘지는 않으며, 유쾌하고 친근한 진지함에서 멈춘다. 우아함은 낭만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힘은 가혹함으로 타락하지 않는다. 뽐내지 않고 미사여구에 탐닉하지 않으며, 신파조로 기절하는 발작으로 타락하지 않고, 차분하고 힘찬 설득력을 지니며, 해야 할 얘기만 한다.
-`아티카의 풍경은 이상적인 인간의 특성을 규정지어서,` 에 이어 나온 문장들. 사람이 아니고 지역이다.

젊은이, 물론 난 기도를 했어요. 모든 종족과 모든 시대는 저마다 신에게 나름대로의 가면을 부여해요. 하지만 모든 종족과 시대가 부여하는 모든 가면 뒤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똑같은 신이 항상 존재하죠.
-여기서도 `양파` 등장. 반갑고 건강한 신앙.

나는 행복감으로 숨이 막혔다. 나는 친구를 쳐다보고 얼마나 벅찬 기쁨이냐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나는 얘기를 하자마자 마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그 짐승이 내 체취를 맡고 도망치지 않도록 숨을 멈추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서 나도 모르게 아주 작디 작은 외침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여우는 소리를 듣고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는지 미처 내가 찾아보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인간의 행복이란 항상 그렇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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