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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얼마 전 개봉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라는 영화가 많은 폐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벌써 열 번이나 본 사람도 있다더군요. 그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이야기지요. 잘 짜여진 스토리에, 한 번으로는 놓치기 쉬운 섬세한 디테일로 인해, 한 번만 봐 가지고는 그 영화의 진정한 맛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더군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동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참 잘 짜여진 스토리에, 한 번 읽어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 심장한 대사들과 잘 쓰여진 문장들로 인해 한 번을 읽고 곧이어 또 한 번을 읽었습니다. 두 번째 읽은 뒤에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의 전개라던가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 숨겨진 의미들이 하나 하나 이해되기 시작하더군요.
스토리의 역사적인 배경은 아주 단순하지만, 그러나 소설의 스토리마저 그런 단순한 동선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지루함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에, 작가는 중간 중간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 놓거나 회상 장면을 삽입함으써 그러한 단조로움을 무난하게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세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껴 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약소국의 설움을 느껴보라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교훈도 없고, 분명한 메시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저 볼모로 잡혀온,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도 저도 선택할 수 없는 세자의 무기력한 입장만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는 클라이막스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뭔가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듯한 감정의 격랑을 경험할 수 없는 밋밋한 전개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한 무엇인가가 이 소설에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라는 공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세자는 그러하였을 것이다. 정말로 그 주변 사람들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라는 공감이 오늘날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그쪽 세계를 관심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는 이야기이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감동을 받았던 부분은 소설의 내용이나 전개의 짜임새보다도, 작가의 글(문장)에서 느껴지는 힘에서였습니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같지 않은, 마치 시와 같이 많은 함의를 내포한 무수한 단문의 문장들 속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원에 대한 추국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죄인이 모질어, 그 죄가 더욱 모질었다(217쪽)."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한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 문장도 그 문장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한 번 읽고 말았을 일개 소설에 지나지 않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이 짧은 문장이 기원이 처한 상황을 단번에, 그리고 전체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음을 느낀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다시 읽으면서 이와 같은 문장들을 계속해서 찾아낼 수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문장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작가가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대상문학상과 같은 쟁쟁한 상들을 수상했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짤막 짤막한 문장들 속에서 느껴지는 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얼마 전에 추노라는 드라마가 종영되었는데, 그 드라마의 배경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소현 세자의 시대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소설이 추노의 인기를 등에 업고 가기 위해 급하게 쓰여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무려 오 년에 걸쳐 쓰여진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책을 읽어 가면서 그 정도의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참 잘 쓰여진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몇 번 더 읽어 보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반지의 제왕이라던가, 해리 포터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을 보고, 한 번 봤으면 되었지 뭘 또 계속해서 보나 싶었는데, 이 책이 제게는 그렇게 보고 또 보고 싶은 책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읽은 '쓰는 동안'이라는 책에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쓴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보라고 하던데, 이 책이 바로 그렇게 그대로 옮겨 볼만한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소설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