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지옥에 가다
이서규 지음 / 다차원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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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라는 신분을 가지고 이런 제목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제목이 시선을 끌었는데다가, 책 소개를 보며 과거에 읽었던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된 바람애 관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살인과 산사를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살인이라니 뭔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또 '장미의 이름'에서 예상밖의 범인과 살해 동기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책도 나름대로 인상적인 결론을 보여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책은 그러한 기대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결론을 보여주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범인이나 범행동기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졌을 때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살해 동기의 애잔함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건의 배경이 되었던 비극적인 시대 상황(6.25 사변과 불교계의 내분)을  소설의 소재로 끌어 올 생각을 했다는 것에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짜임새 있는 내용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도 무난했고,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감도 있었습니다.

 

다만 옥에 티라 할 만한 것이 주인공인 휘문 스님이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도문 스님을 떠보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대화의 전개는 전혀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도문스님에게 던진 질문들은 대체로 두서가 없었고 자연스럽지도 않았는데, 지나치며 물어보듯이 자연스레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심문하는 것처럼 보여서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그 질문을 받는 도문 스님은 주인공의 질문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나를 의심하는 거냐고 화를 냈어야 할 만한 상황에서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한 두 곳 정도 더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만 좀 더 다듬어 준다면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장미의 이름'도 다시 개작해서 재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도 그렇게 해서 완성도를 더 높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절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보니 처음 접하는 불교 용어도 있었지만, 저자의 친절한 설명으로 인해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불교의 다양한 교리들에 대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비의 방법과 과정에 대한 설명, 특히 어떤 조건에서 사리가 만들어지는 것지에 대한 설명이 특별히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비구와 대처승들간의 세력 다툼에 대한 내용도 흥미로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모두 다 독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대처라 하여 가족들을 거느린 스님들도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다 크고 나서야 결혼한 스님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보니 원효 대사 이후로 대처의 풍습이 계속 전해져 왔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일제 치하에서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사실은 정치적인 강압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만) 더 확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아는 만해 한용운도 대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절에서 몰아내려 했고, 그러한 가운데 결국 비구와 대처가 서로 다투던 끝에  다른 종단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처승들의 종파가 태고종이라고 하더군요.) 

 

책을 덮으면서 '장미의 이름'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처럼, 이 소설 역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류의 흐름을 타고 우리와 비슷한 비극을 겪은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동남아 국가들(특히 불교국가들)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훌륭한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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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2012년 12월 우리가 뽑아야 할 12번째 대통령
고성국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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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이제 한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는 시점입니다.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박근혜를 찍으려 할 것이지만, 안철수의 등장으로 인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나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박근혜 주변에 있는 십상시들에 대한 염려가 그러한 분열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보입니다. 진보적인 입장에서 서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민주통합당을 지지해 오던 사람들 중에도 문재인이 아닌 안철수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이렇게 대선 구도가 삼파전이 된 것도 참 오랜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렇게 셋이 붙었던 1987년 대선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협상이 깨지는 바람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더랬습니다. 이번에도 어쩌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협상이 깨지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아마 안철수가 대통령이 될 것 같고, 그 다음에는 문재인이 뒤를 이을 것만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영삼을 닮은 이가 안철수이고, 김대중을 닮은 이가 문재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는 국민 정서상,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일수록 기회를 늦게 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흐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이 나라의 장래가 밝아지려면, 정말 제대로 된 대톨령이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기대하기로는 브라질의 룰라 대톨령 같은 분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만, 지금으로써는 누가 그와 같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만한 사람인지 분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저 막연하게 '나는 보수니까, 또는 나는 진보니까 이 사람을 찍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기준으로 대통령을 뽑아 온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더 이상은 그런 방식으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대통령 후보를 찍을 것이냐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데에 있어서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은 정치평론가인 고성국 박사가 진행을 맡아 보수 정치인 두 분(윤여준, 원희룡)과 진보 정치인 두 분(노회찬, 박영선)을 따로 만나 대담을 벌이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중에서 그래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분들을 만나 이번에 선출되어야 할 대통령은 과연 어떤 대통령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들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고성국 박사가 보수 정치인 두 분과 진보 정치인 두 분에게 질문한 내용들이 서로 다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측에 똑같은 질문을 던졌어야 맞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생각해 보니 보수 정치인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진보 정치인들에게 던졌다면, 누구나 다 예측할 수 있을 만한, 너무나 뻔한 대답이 나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행자가 양측에 대해 다른 질문을 준비한 것은 나름대로 고민해서 결정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잘 선택한 질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진행자가 보수 정치인들에게 질문했던 것은 과거의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두 분 정치인의 평가는 제가 보기에 상당히 객관적인 평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보수 입장의 대통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들기를 하지 않았고, 공과의 비율에 대해서 내련 평가도 그다지 치우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는 피해자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평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두 분의 보수 정치인이 동일하게 말하고 있었던 대통령의 자격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잘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윤여준씨는 '바람직한 국가통치능력이 있는 사람, 풍부한 이론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식을 결합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고, 원희룡씨는 '민주주의 리더십을 갖춘, 검증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희룡씨는 여기에 덧붙이기를 '인물도 인물이지만, 정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고 기대는 것이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크게 잘못되지 않는 시스템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 같아 보였습니다. 

 

진행자가 진보 정치인들에게 질문했던 것은 조금 복잡하고 다양했는데, 진행자의 질문은 '진보가 뭐냐, 박근혜 후보를 어떻게 생각하냐, 민주통합당의 현재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주사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나꼼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두 분도 대선에 출마할꺼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진보 정치인 두 분의 대답도 상당히 합리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진행자의 질문이 보수 정치인들과의 대담과 비교했을 때, 진보적 입장의 두 분이 느끼기에 조금은 아픈 곳을 찔러 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진행자의 요즘 행보를 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진행자로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듯한 느낌을 보여 준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분의 진보 정치인이 동일하게 말하고 있었던 대통령의 자격은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노회찬씨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대답했고, 박영선씨는 '기회균등과 공정성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 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제119조(경제 민주화 조항)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박영선씨는 여기에 덧붙여 '그 사람이 무엇을 해 온 사람인지를 보고 뽑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두 그룹의 답변을 비교해 보면 보수 정치인들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반복한 반면에, 진보 정치인들은 앞으로의 국정 운영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정치인들이 경제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진보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 때와 같이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정을 맡았다가 모피아들에게 휘둘리고, 삼성장학생들에게 휘둘리는 가운데 경제를 망치는 일이 다시금 반복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뽑아야 할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라는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국정 운영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가 볼 때에 대통령 후보 세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그 기준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도 준비되지 않았기는 마찬가지라고 평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에 나온 후보들 모두가 국민들이 기대하고 있는 수준에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미치지는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그런 분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나은 인물을 찍어야 한다는 결론인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원희룡씨가 지적했던 것처런 또 다시 인물에 기대는 선택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만한 대선 후보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후보들을 앞에 두고 헛된 기대에 들떠 있는 분들을 보면 측은하기도 합니다. 누구를 뽑든 일 년이 못 되어 실망하고 욕하게 될 것이 자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라 경제가 전체적으로 가라앉고 있는 이 시점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욕을 먹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아마도 차기 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계속해서 경제가 추락할 것이고, 차차기 대통령이나 그 다음 대통령 즈음에야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대통령이 되는 분은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분이 아닌 이상 국민들의 욕을 먹으며 임기를 마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저로서는 제가 뽑고자 하는 그분이 차라리 이번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책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책에 대한 소감보다는 제 생각을 너무 많이 늘어 놓은 듯 싶습니다.. 저로서는 이 책을 통해 과거 역사에 대한 평가를 논리적으로 일관된 흐름 속에서 들어 볼 수 있었고, 또 현 시점에 있어서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해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진 분들이 보시기에는 너무 원론적이고 기초적인 수준의 내용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을 앞두고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할까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점검해 보기를 원하는 분들이 읽어보면 다양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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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부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가 - 작은 정부가 답이다
존 스토셀 지음, 조정진.김태훈 옮김 / 글로세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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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이렇게 열받아 보기도 오랜만입니다. 저자의 의도적인 거짓말인지, 아니면 저자의 시야가 좁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이 너무 많이 눈에 뜨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의 지적 가운데 옳은 지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대체로 무능하거나 틀렸고, 시장(또는 기업이나 개인)은 언제나 유능하고 또 옳다'라는 식의 단순한 도식화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습니다.


저자는 자신도 처음에는 정부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업의 비리를 밝히고 정부의 통제를 요구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점차 정부의 무능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시장의 기능을 점차 신뢰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정부에 대해 잘못된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입장이 전형적인 자유시장주의자의 입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이승훈 교수의 경제학 멘토링'에서 읽었던 내용들과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족벌 자본주의를 지양하며,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줄이고, 망할 기업은 망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등의 주장이 서로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대체로 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과 '현실적인 가르침'을 대조하면서 왜 전자가 틀렸는지에 대한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옳다고 말하는 '현실적인 가르침'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더 옳다고 느껴졌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자의 주장 가운데 '정부는 경제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고 '정부는 개인보다 돈을 제대로 못 쓴다'는 생각이 옳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정부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의 대공황 당시 루즈벨트 정부는 뉴딜 정책을 통해 미국 경제를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미국의 대공황이 자유주의 경제 상황 하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주식거래에 대한 규제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저자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파산을 선고받은 정부도 있지만 파산을 선고받은 수많은 개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정부 역시 기업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모여 이룬 조직이라는 점 역시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방만한 기업은 방만한 개인들의 작품이며, 방만한 정부 또한 방만한 개인들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모여 기업을 이루고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모여 정부를 이루고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옳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기업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여주는 반면 정부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치게 편파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주장 가운데 '장애인에게는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은 틀렸고 '그러한 보호는 장애인에게 상처를 준다'는 생각이 옳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이것도 그 보호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정부에서 장애인들에게 의족이나 전동휠체어 같은 것을 지원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또한 건축에 있어서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 설치의무화가 반드시 필요한 규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ADA(장애인 보호법)에 의해 야기되었던 한 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 장애인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저급한 소송 남발 문화가 문제이지 ADA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정부가 운영하는 의료보험이 시행되면 모두가 평등한 치료를 받는다'는 생각은 틀렸고 '모두 평등하게 이류 치료를 받는다'는 생각이 옳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이 역시 일부 국가(영국가 캐나다)의 부정적인 사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정부가 운영하는 의료보험이 상당히 잘 운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저자는 아마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미국의 의료보험에 있어서 직원들의 의료보험을 (혜택을 보는 당사자인 개인이 아니라)기업이 전액 부담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자의 주장은, 이러한 제도로 인해 환자들의 무분별한 치료 요구가 증가됨을 통해 재정낭비가 심화되고 있고, 그 결과 계속해서 의료보험료가 상승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에 본인부담금 제도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난치병의 경우에는 본인부담금의 비율을 어느 정도 이하로 제한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정말 열받게 했던 내용 한 가지는 '방사능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다'는 생각은 틀렸고 '방사능은 식품의 안전을 확보하는 수단이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저자는 방사선 처리를 식품 안전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라는 책을 보면 카길사에서는 분쇄육을 암모니아로 살균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도축 과정에서 고기가 대장균에 오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암모니아 살균으로도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을 완벽하게 살균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오마하 스테이크사의 경우에는 분쇄육에 방사선 살균을 하기 때문에 세균도 없고 맛도 좋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분쇄육이 더러운 환경 속에서 생산된다는 점입니다. 소들은 똥으로 범벅이 된 채 도살장에 도착하는데, 이런 더러운 소들을 도축하게 되면 그 고기가 대장균에 오염될 수밖에 없고, 또 아무리 깨끗하게 씻긴 소라 하더라도 그 내장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장균에 오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사선 조사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똥에 방사선 조사를 해서 대장균들을 다 죽이면 그 똥은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저자의 주장 역시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도축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지금보다 더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모든 유럽 국가에서는 전수검사를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우병이 발생했던 영국에서 생산된 소고기보다 미국에서 생산된 소고기를 더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가 지적한 내용 중에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 정부의 지나친 규제에 대한 저자의 지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가 예로 들었던 다양한 규제들 가운데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까다롭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규제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총기규제에 대해서까지 문제삼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총기를 규제하지 않았다면 묻지마 살인에 의해 벌어진 잔혹스러운 살인의 희생자들이 얼마나 더 크게 늘어났을지 모릅니다. 왕따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이 총기를 학교에 가지고 가서 급우들을 살해하는 사건도 무수하게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저자는 그런 끔찍한 사건들이 총기소지가 허용된 나라들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무자격 목사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그리고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단기간의 속성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된 다음 여신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성도들이 스스로 검증해서 떠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규제나 교계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자의 관점(소비자는 똑똑하니 불량제품을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불량기업을 외면할 것이다. 그러니 규제는 필요없다. 시장에 맞겨 두면 된다.)에 따르면 '사람들은 똑똑하니 스스로 알아서들 무자격 목사를 분별해서 그들로부터 떠날 것이다'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사기꾼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몸까지 갖다 바칩니까? 그런 점에서 '개인은 신뢰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저 뜬구름 잡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청교도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자는 청교도들이 개척한 플리머스 식민지가 '공동생산 공동분배 제도'로 인해(그로 인한 게으름 때문에) 거의 굶어죽을 지경에 처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후에 거주민들에게 각자의 땅을 갖도록 허용하자마자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최초의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전형적인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 정착자들이 처음에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추구했던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성경은 분명히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고, 자발적인 나눔만을 장려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약시대에는 각 가문, 각 가정 별로 나누어 받은 땅을 영원히 팔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사회안정망까지 구축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통해 제가 깨닫게 된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으로 문제가 심각한 나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자의 글을 보면 미국정부는 필요한 규제보다는 불필요한 규제를 더 많이 만들어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고, 미국인들은 이기심에 사로잡혀 정부의 지원을 어떻게든 얻어내 날로 먹으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은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극단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사회는 이미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지않아 대규모의 재정 붕괴를 통해 망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대처 방법 역시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우리나라가 모델로 삼아야 할 나라로서 절대적으로 부적합하며, 차라리 북유럽 국가들을 모델로 삼는 것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유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주장 대부분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에 별 한 개를 주기도 아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네 개를 준 것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보수주의자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도 한 번 쯤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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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jsdnaka10 2020-07-10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존경스럽습니다.
 
뇌로부터의 자유 - 무엇이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을 조종하는가?
마이클 가자니가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을 기초부터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입니다. 전문가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예상과 다르지 않게 수준 높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상세하고 논리적인 서술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과거에 읽었던 '범인은 바로 뇌다'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완전히 반대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적지 않았고 그 내용들이 대단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주장이 가당키나 한가 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니 그 책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기보다는, 신경과학의 성과를 법 현실에 반영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내용 전개 과정에서 새롭게 배우게 된 내용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저자는 먼저 뇌라는 기관이 부위 별로 코드화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특히 오른쪽 뇌와 왼쪽 뇌의 기능이 완전히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둘을 이어주는 뇌량을 제거했을 때 벌어지는 반응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병변으로 인해 좌우의 뇌를 서로 분리해 놓은 환자들의 경우, 우뇌에 물체를 보여주어도 물체의 이름을 표현하지 못했고(좌뇌의 언어중추가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물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빛을 감지하면 왼손으로 반응을 보이라고 한 뒤에 우뇌에 빛을 비추면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빛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는데, 이는 그의 양쪽 뇌 사이의 정보 전달이 완전히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쪽 뇌에 주어진 시각, 촉각, 청각, 후각 정보는 그 쪽 뇌에서만 처리되고 반대쪽 뇌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리 뇌 연구를 통해 좌우 뇌의 기능이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분리 뇌 환자들의 의식은 두 개로 분리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저자는 '뇌에는 모든 종류의 국소적 의식 체계가 존재하고 이 체계들이 하나의 무리를 지어 의식이라는 것을 형성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는 해석기 모듈이 좌뇌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밝혀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합된 의식은 자아라는 느낌으로 존재하는데, 실제로 이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의 기술에 이어 저자는 물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솔직히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자가 그러한 내용을 통해 결정론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결정론을 따르면 자유의지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경과학계의 발견들은 온통 결정론적 세계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이들이 단호한 결정론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카오스 이론, 나비효과, 불확정성 원리와 같은 것들을 통해 사소한 입력의 차이가 얼마나 커다란 결과의 차이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결정론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저자는 창발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의식이란 창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뇌는 결정공식을 따르는 자동 기계지만, 뇌 하나만 떼어 놓고 분석해서는 책임이라는 기능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책임이란 사회적 교류에서 발생하는 삶의 차원에 존재하며, 사회적 교류에는 둘 이상의 두뇌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 이상의 뇌가 상호작용할 때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그와 함께 새로운 규칙도 생겨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같은 새로운 규칙을 얻은 두 가지 특성이 바로 책임과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뇌 자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뇌는 정신을 낳고 정신은 뇌를 움직이는 상호작용이 벌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 하였습니다. '사회 집단은 개인의 행동을 조정하고, 개인의 행동은 사회 집단의 진화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행동은 그저 결정론적이고 외부와 격리된 두뇌가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며, 사회 집단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이러한 과정에 거울신경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타고난 도덕적 성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근친상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인류 공통의 경향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대다수의 거부감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한 정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타고난 도덕적 성향이 뇌 전역에 구석 구석 퍼져 있는 도덕 회로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모두는 동일한 도덕 가치의 연결망과 체계를 공유하며 유사한 사안에 대해 대개 비슷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뇌의 병변으로 인해 이러한 도덕적 성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이제 저자가 다루고자 하는 자유와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됩니다. '뇌에 병변을 지닌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가, 뇌에 있는가'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뇌에는 정상적인 지능을 방해하는 병변, 손상, 충격 또는 신경전달물질 장애 같은 것이 발생할 수 있고, 그 결과 뇌의 능력이 약해져 책임감이 떨어질 수 있는데, 이것이 범죄가 아니라고 해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뇌 영상을 법정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신경과학자들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신경과학이 현재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 가지 법적 영역은 책임, 증거, 처분 판정 중의 희생자와 범죄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검사 결과 비정상적인 뇌를 가진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 행동도 비정상적이라거나 비정상적인 뇌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있지만, 저자는 책임은 뇌에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책임은 사회계약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해자가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행동이 공개된 장소에서 금지된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고, 인적이 드문 장소가 나타날 때까지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범죄자들에 대해 뇌에 문제가 있어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추정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실제 사례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한 사건에 대해 저자가 비판한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정신분열증 환자도 규칙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법은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잘못된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의 잘못된 추정은 좌측 전두엽 병변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좌측 전두엽 병변이 폭력적 행동에 대한 에측 변수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전두엽 병변을 가진 경우, 이상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본인은 물로 가족과 친구도 그들의 변화된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폭력 횟수는 겨우 3%에서 11~13% 정도 증가할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증거의 문제에 있어서 저자는 뇌 영상, 거짓말 탐지, 독심술 및 목격자 진술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매우 간단하게 설명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벌에 있어서의 정의 문제에서는 세가지 종류의 정의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응징적 정의, 실리적 정의, 회복적 정의가 그것인데, 연구의 결과 97%의 사람들이 응징적 정의의 관점과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실리적 정의보다는 응징적 정의가 인간의 본성적인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의 강도에 따라 그 입장이 달라진다는 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범죄의 경우에는 응징적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경범죄의 경우에는 회복적 정의(갱생)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응징적 정의가 인간의 본성적인 성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철학자 자넷 래드클리프 리처드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응보주의자로서의 정서가 인간의 특성을 구성하는 깊고 중요한 측면임을 인지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이것이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고 떠들지 않고도 그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처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자신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모른다고 말했다는 점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저자가 이른 결론은 '자유와 책임은 나의 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며, 범죄에 대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섬세한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내 '뇌'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뇌의 문제로 인해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뇌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격리시켜야 마땅하지만, 뇌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 뇌의 문제로 인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뇌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완전한 격리를 판결한다면, 뇌의 문제를 핑계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뇌의 문제를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실리적 정의의 잣대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신경과학이 더 발전한다면, 이러한 판결에 있어서도 더 섬세한 분별의 기준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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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트 - The Brilliant Thinking 브릴리언트 시리즈 1
조병학.이소영 지음 / 인사이트앤뷰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표지만 보고 뉴에이지, 또는 명상과 관련된 내용의 책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신비주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세상을 가볍게 바라보는 데에서 벗어나 그 본질까지 깊이있게 이해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로 가득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책의 두께와 무게로 인해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펼쳐 보니 큼직한 글씨체에 풍성한 삽화가 실려 있어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우화처럼 쓰여져 있어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엇습니다. 하지만 한 장이 끝날 때마다 그 내용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이 '생각노트'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더 깊이 있는 숙고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현명해 질 수 있고, 생각의 크기가 커져야 현명해 질 수 있다. 또한 현명해 지기 위해서는 오감을 발달시켜야 하는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 오던 것을 다르게 받아들이려 해야만 오감이 발달된다. 또한 경험과 학습을 통해 이성을 발달시켜야 현명해 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발달시킨 이성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감성 또한 발달시켜야 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서라야 현명함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현명해 지기 위해서는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상상의 훈련(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상상 속에서 노래 부르는 것과 같은)도 필요하다. 또한 피상적인 모습보다 숨겨져 있는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남의 것을 답습하기보다는 자신의 색깔에 맞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을 채우고, 오감을 발달시키고, 감성을 키우는 일이 필수적이다. 직관은 직감을 뛰어넘는 것으로써, 직관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성을 키우고, 그 다음으로 언어와 이미지의 파이를 키우고, 그 다음으로 왜, 어떻게, 그래서라는 또 다른 차원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와 '어떻게'는 인식된 세계의 본질을 찾는 과정이고, '그래서'는 찾은 본질에 대한 고찰이자 새로운 대안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학습을 통해서만 미래를 만들 수 있다. 학습만이 꿈을 현실로 이루어줄 수 있다. 그리고 꿈을 현실로 이루려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그 내용이 굉장히 단순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 같은 내용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화 속에 등장하는 큰 독수리가 작은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다 보면 이러한 교훈이 아무렇게나 도출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치밀한 전개를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설득하면서 나아가고자 하는 저자들의 노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위인들에 대한 소개를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어 놓은 것도 저자들의 세심한 배려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이 책은 성인들보다는 청소년들이나 대학 신입생들에게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형적인 청소년 교양서의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제 아들 녀석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굉장히 심오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기대했던 장년이라면 약간은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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