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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사상사 - 루소에서 기든스까지
존 배리 지음, 허남혁.추선영 옮김, 이홍균 감수 / 이매진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나는 왜 '동유럽'의 환경오염이 심각할까 생각했다. 1980년대는 '소련'이 두번째 강대국으로 생존한 시점이었다. '소련'이라는 말은 사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 모르기 십상이다. 아마 40대 넘어야 할 것 같다.
'소런'이 역사의 너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후, 다시금 '러시아'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레닌그라드는 다시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다시 '볼고그라드'로 바뀌었다. 소련이 사라진 후 맑스주의는 죽은 개 취급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유일한 제국 미국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다시금 맑스주의는 '주목' 받게 되는 듯 하다. 각광받지는 절대 못한다. 최신의 담론 환경생태학의 등장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환경사상과 철학, 그리고 생태학의 담론은 '최신'이었다. 노르웨이에서 나온 내스의 '심층생태학'이 바로 1977년에 출간된 것을 보면 마치 '시대의 전령' 같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사회생태론'이라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어떤 면에서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생태주의에 담은 머레이 북친의 사유도 이때쯤 출발했다.
문제는 바로 이 시점인 1970년대에서 1990년초 사회주의 붕괴시점까지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의 환경문제 또는 환경교육에 대한 인식이다. 당대 이 나라들에서 '대표'로 나온 사람들이 여타 '자본주의국'에 대하여 하는 말은 다 동일했다. "자본주의가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이므로 자본주의를 폐절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환경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는 동유럽 지역의 환경오염이 더 심했었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는 '석탄산업'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아니었나 싶다. 이는 기술발달의 정체에 해당한다. 여기에 '지령경제'라는 과도한 '계획'의 남용과 '미집행'에 연유한 '경제적 재생산'의 멈춤이 크게 기여했다.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일찍 환경보존에 대하여 '의식'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런 과정 전체가 '관료적 통제'에만 의존했으니 잘 되지 않은 것이다. 경제가 잘 안돌아가는데 '환경'인들 챙겨졌겠는가? 지금 환경보전이 가장 잘된 나라들은 대부분 북서유럽국가들이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들일 경우가 많다. 가령 '독일'에 대하여는 사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숲'이 잘 보존되어 있고 신재생에너지 전환 비율이 높다는게 눈에 띈다. 환경보전이 잘되고 있는 '큰 나라'의 사례이다. 북유럽 나라들은 '작은나라'의 사례들이다.
왜 그랬을까? 녹색사상사에서 가능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맑스주의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맬더스는 1798년, 그러니까 '산업혁명의 초입'이면서 '지주의 시대 말기'에 활약했다. 크게 증가하는 '빈민'인구에 놀라 내지른 '비명'이 '인구론'이었다. 당대 영국의 인구는 겨우 1천만명이었다. 1700년대의 1백년간 프랑스는 인구증가율이 떨어졌지만 영국은 크게 늘어난 결과였다고 한다. 영국의 인구증가는 '엔클로저' 운동의 결과로서 '대토지소유'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혁과 더불어 농업기술의 비약적 향상에 의한 '농업 생산성의 획기적 증대'에 기인했다. 그리고 이렇게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던 1700년대는 '제철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전시대에 '숯을 사용하는' 가내 수공업 제철업이 '숲'의 과도한 파괴로 위기를 불렀다. 이는 확실히 '에너지 전환'의 압박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당대의 영국은 땅만 파면 석탄이 나올 정도로 풍부했다. 이미 이것을 조금씩 연료로 사용했다. 제철업에서도 석탄을 사용해왔지만 '숯'을 대체하는 '코크스'는 발명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기술적 난점이 1700년대에 해결되자 드디어(!) 나무가 석탄으로 대체되었다. 뉴커멘 증기펌프가 와트의 획기적 개량으로 효율이 향상되면서 석탄 가격이 떨어져 갔고 운하와 같은 운송수단도 석탄이 값싼 '대체에너지'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바로 이런 시대의 '말기'에 맬더스는 빈민의 인구증가에 놀랐다. 그 '빈민'은 물론 엔클로저에서 밀려나 '도시'로 상경하여 결국 증기기관으로 가동되는 초창기 면직공장 이런데 취업한 초기의 '노동자'들이었다. 당시에는 5세아동에서 여자들까지 전부 공장에서 일했다. 맨체스터에서 노동자 수명은 겨우 17세, 전문직은 36세였다고 한다! 이 '야만'이 산업혁명의 실상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다. 허나 이런 이야기를 연구한 프랑스의 뽈 망뚜는 그래도 영국의 당대가 '프랑스'보다 나았다고 얘기하니 이 시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가난한 사람들의 참상은 정말 심각했던 것이다.
녹색사상사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왜 소련과 동유럽에 환경문제가 만연하게 되었을까? 경제적 재생산의 문제와 더불어, 맑스주의 자체에 내재된 한계가 있었다. 저자는 맑스주의가 탄생시점부터 '맬더스'적 사유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구론'은 몰락하는 지주계급의 '비멸소리'에 불과한 '이데올로기'이다. 실제 '인구론'의 정치사회적 성과란 빈민층에 대한 '구제기금'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요컨대 '복지'를 줄이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였다.
당대의 맑스는 맬더스 이후, 산업혁명의 '세계사적 전개'의 한복판에 생존했다. 그리하여 그는 증기의 엄청난 '산업적 폭발'에 놀란 나머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바로, 그의 후예 노동자와 노동자당들이 '환경'문제를 등한시 하도록 말이다. 자본론 3권에 농업생산의 '환경적 한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듯 했다. 맑스는 요컨대 자본주의가 엄청난 생산력을 향상시켜 가면서 그런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단지 자본의 편이 아니라 '노동'의 편에서 그랬다는점이 다르지만.
그리하여 오늘날 '환경운동'은 대개 '중류층'의 운동이기 십상이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노동조합은 환경운동과 '친화적'이기 어렵다. 말하자면 '산업구조'라는 측면에서 무너져버린 공산주의 국가나 현존 자본주의 국가나 '동일'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라는 틀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에 착목했을 뿐이지 환경과 생태 자체에 대한 관심과 문제설정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국가 모두 미흡했다는 것이다.
녹색사상사는 이 지점에서 아주 훌륭한 통찰을 내보이는데 나는 엉뚱한 해석을 하려 한다. 바로, 페이비언 사회주의 '원류'에 닿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유이다. 그는 당대에 '지속가능발전'의 사유를 이미 하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점은 사실 영국의 '제국적 확장'이 정점에 이른 시점이었다. 1880년에서 1900년까지가 이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영국 제국주의는 '증기'에 기초한 '자본주의' 산업화에 기반하고 있었다. 즉, 증기시대의 마감이 바로 영국 제국의 후퇴 시점이었고, 당연히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사유가 가능했던 셈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지금도 환경운동이 대개 중류층 운동으로 머무는 듯 하다. 매우 '근본주의'적 지향을 함의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 한국 환경운동은 더욱 심하다. '새만금'에 대하여 근본생태주의 입장에서 격렬하게 반대하나 '정치영역'으로 들어오면 온건 신자유주의 입장으로 돌아서는 모순을 보인다. 서유럽이 '사회주의'의 실현으로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체제를 경험한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군사독재국가에서 곧바로 부르즈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수준에 머물러서 그러했을 것이다.
이 책은 지속가능발전의 '언류'에 해당하는 사상의식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헤친다. 읽을 수록 생각하라 거리를 많이 던져주면서 '사유'의 풍부성과 깊이를 더해 준다. 하지만 잘 읽히지 않는 책이라 안타깝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