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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평점 :
보수주의는 영어로 conservatism이라고 하죠. 환경보전할때의 '보전'을 conservation이라고 사용할때가 있습니다. preservation과 섞어서 사용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말 '보존'은 그냥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보전'은 동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숲을 '보존'하면 그냥 놔두는 것이고 숲을 '보전'하면 '재생'을 감안하여 적절히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숲은 정말 잘 '보존'되었습니다. 나무를 건축에 사용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숲은 황폐화되지 않으면서 잘 '보존'된 것입니다. 일제시대 들어서 '남벌'이 이루어지면서 그 숲과 원시림의 나무들이 모두 베어졌다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숲은 사실 박정희 시대 이후의 '인공적 조림사업'을 통해서 새롭게 조성된 것입니다. '식목일'을 정부에서 지정하고 나무심기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친 결과라는 것이며, 이보다는 연료용 화목채취를 금지시키고, 석탄과 천연가스 그리고 석유로 난방연료를 대체한 결과라 합니다.
말이 나온김에, 박정희 정부는 엄청난 '통제'의 시대이고 '반민주 반민족' 이런 수사로 비난되어 왔지만 '보존'의 측면에서 여러가지 '선구적'인 업적이 있습니다. 가령 1970년대 중후반의 자연보호운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입산금지'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식목일을 활용한 대대적 조림사업과 더불어 난방용 연료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월드워치의 창립자 레스터 브라운 조차도 한국의 숲이 모범적으로 복원된 사례로 인용할정도로 숲의 복원은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이제 '생태적 관점'에서 사실상 '어거지 조림'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모범사례가 있는데 영국 런던을 모방한 '그린벨트'의 설정은 정말 시대를 앞선 조치였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만약 '보수적'인 정부였다고 한다면 '보수적'인 조치중에 속하는 '숲의 조성과 보존'과 같은 정책은 그 이념지향에 딱 알맞은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결코 '보수적'인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정부 기구에 '경제기획원'을 두고 거의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 체제 비슷한 것을 정부가 이끌어 나가는 상태였습니다. 개발독재 보조금 경제라고 불릴 이런 체제속에서 한국경제는 엄청나게 확대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경제기획원이 있었고 거의 소련의 '고스플란' 수준으로 '산업적 기획'을 한 곳이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군사정부가 무너진 후 경제기획원이 사라지고 재정경제원이 등장했습니다. 국가 '규제'는 전부 '군사독재의 유물'로 치부되면서 민간정부는 '시장원리'에 따라 경제가 운용되도록 가능한 모든 정부규제는 풀어헤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외환위기라는 외부적 변수가 엄청난 압력을 작용한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다름아닌 이 순간, '보수'가 아닌 '보수'가 등장할 빈틈이 벌어졌습니다. 그린벨트는 이제 훼손될 대로 훼손되고, 건설업과 유착한 정부의 재정-건설 관료들이 그린벨트의 '공유지'를 '규제완화'의 미명하에 해제하면서 아파트 부지로 조성하여 공급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제 '보수' 아닌 '시장만능주의'가 박정희 시절의 긍정적인 유산마저 모두 훼손하기 직전 상태에 와 있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문명의 몰락'에서는 왜 '보수주의'가 생기는지 한 측면에서 아주 절절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는 '아이슬란드'를 개척한 바이킹의 사례를 서술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정착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린란드'와 대비하여 서술합니다. 한국을 휩쓰는 '시장원리'는 마치 어떤 물질적 환경적 조건조차도 그것 하나만이면 다 넘어설 수 있다는 '주관주의' 또는 '주의주의'의 환상속에 한국사람들을 물들인것 같습니다. 이 순간, 인간의 의식형태 조차 물질적 삶의 조건속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라는 테제는 잊혀집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맑스의 이 '새삼스런' 테제가 맑스주의와 무관한 '환경고고학자'의 눈을 통하여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아이슬란드의 바이킹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숲'을 보존하는 것 만이 아이슬란드에서 삶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물 에너지 흙 공기 등 '생태계'의 기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통찰'을 매우 가혹한 환경조건속에서 깨달은 것이죠.
이렇게 살아남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라고 이 사람은 표현했습니다. 정말이지! '보수적'이라는 말을 '보존적'이라고 바꾸면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이때의 '보존적'이라는 말은 사실 '개발'이라는 말의 반대의미를 갖죠. 나무 하나 베어내고 밭 한뙈기 개간하는 정도의 '개발'만으로도 아이슬란드는 곧바로 '물과 흙'의 문제에 부닥치게 된 경험이 작용한 것이죠. 숲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토양이 침식되고 물은 당연히 부족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이슬란드 같은 화산섬에서는 '토양침식'이 곧바로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슬란드의 바이킹이 터득한 지혜는 양이나 돼지처럼 무차별하게 식물과 그 뿌리까지 파헤쳐 먹어치우는 동물은 사육하지 않는다는 것. 숲의 나무는 절대로 베어내지 않는다는 것. 토양침식을 일으킬 개간 등을 하지 않음. 섬 근해의 물고기 잡이를 주산업으로 삼는 산업의 전환을 이룩한다는 것 등등.
우리나라 오늘 어떠할까요? '대운하'로 표상되는 '보수'진영의 '개발계획'은 사실 이 사람들이 진정한 '보수'가 전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 뿐입니다. '보수'는 지킨다는 의미인데 지킬게 없는 것이죠. 그동안 이 사람들이 '지킬 가치'로 여겨져 왔던 것들이 사실 다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뭐 별로 내세울게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만능주의'에서 한국의 보수는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시장원리'만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데 '입맛에 맞게' 이데올로기는 그저 '담론'으로 활용될 뿐이죠. 이때 '지키고자 하는' 것중에 가령 아이슬란드와 같은 '환경보전'과 같은 가치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유재산'이나 '특권적 지위'가 그들이 지킬 대표적 가치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킬 가치'와 부르짖는 주장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데 대운하 같은 사업에서 그러합니다.
가령 '대운하'와 같은 기획은 '국가중심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사업입니다. 그리고 전혀 onservatism'에 다가서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이런 것은, 가령 '공공사업'으로서 '전쟁'을 자기 임무로 삼았던 1차대전 패배 직후 독일의 '루덴도르프' 같은 사람이 생성한 이데올로기에 다가서죠. '국가'란 타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이며 여자들은 튼튼한 남자 아기를 낳고 길러 이런 국가적 목표에 부응해야 한다는, '스파르타'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런 '이념'은 1차세계 대전의 패배 충격에서 나온, '반드시 복수하겠다'에 바탕을 둔 이데올로기이지만, '국가'를 '전쟁'과 같은 공공사업을 '영구적으로 수행'하는 주체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시장만능주의'하고 또 다릅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히틀러의 파시즘이었던 것입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아이슬란드의 '경제'를 들여다보는 것을 통하여 왜 그들이 '보수적인지'를 잘 밝혀냈습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왜 '중세'가 인간이 스스로를 소외 또는 '외화'시킬 수 밖에 없던 시대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자행된 '숲의 파괴'가 로마제국을 더 이상 지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이루어지면서 '재생'의 시기를 경과하는 동안 '보수적인 중세'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말을 '보존적'이라는 말로 바꾸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중세의 '삼포영농' 같은 것, 장원단위의 자급자족 영농 이런 것 모두 배후가 되는 '숲'을 반드시 전제로, 요컨데 '지속가능한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고,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던 이데올로기가 인간 개체 밖에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의 뜻을 따라 순환적 자연에 순응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동양과 달리 '순환적'인 자연관보다 직선전 발전관이 만연한 서유럽에서는 비록 '요정'이 숲을 날아다닌다는 믿음이 있었다 해도, 당연히 그것은 유일신 중심의 억압적인 '신정질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이나 일본에서 궂이 '신정질서'가 불필요했던 것은 무시간적이며 '순환적'인 자연관 자체가 이미 '환경적 제한조건'을 삶의 기본 조건으로 터득한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죠.
'원령공주'에서는 나무의 요정들이 '숲'을 가득 채웁니다. 기계적 도구적 이성의 시대는 사실 그런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도 인간개체가 '시장원리'에 따라 '이기적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생산성'의 시대였던 셈입니다. 물론 '화석연료'라는, 지질시대 45억년의 '잉여분'을 엄청나게 빠르게 소진한 덕분입니다. 르네상스는 고전 그리스 시대 사상의 부흥으로 얘기되죠. 그 시점은 내 '독단적' 해석에 의하면 중세의 '암흑기'속에서 로마제국에 의해 훼손된 숲이 어느정도로 '복원'된 시점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 로마제국에서 인간개체는 자신을 '밖'의 '신'에 묶어 놓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무와 숲이 여전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초한 경제적 생산력도 풍성했을 것입니다. 허나 인구의 증가에 의해 점점 생산력이 저하되고 결국 숲이 다 사라지면서 숲의 '복원'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것이 '중세'의 암흑기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암흑기'가 아니라 '숲의 생산성'이 복원되는 '기간'동안의 절제였다고나 할까요. 그리하여 숲이 다시금 '복원'되는 시점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당연하겠죠? 이것이 '르네상스' 또는 종교개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환경결정론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원리'에 근거하여 지구의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경종'으로 의미있습니다.
르네상스로부터 인간개체 바깥의 '신'이 다시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으로 되돌아오게 되면서, 마침내 그것은 '과학혁명'으로 이어졌고 '신의 뜻'이 아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의 발견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땅속에서 발견된 지구 45억년의 '잉여생산 유기물'을 사용하는 방법의 '발명'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산업혁명'을 낳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후 인간은 '잉여 유기물'을 엄청 낭비하면서 지구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존재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다음 번 숲'의 복원까지 다시금 인간 개체의 '자유'를 유보하면서 외부의 '신'으로 외화시키는 중세와 같은 시절일까요?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어떻든 '자유'를 유보하지 않으면서 또 '외부의 신'으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음번 '숲의 복원'까지 이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바로 그 '이성'이 작동해야 할 자리를 사람들은 '열광'으로 대체했고 그 '열광'은 '나' 이외의 것을 '적'으로 돌리면서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생명을 '말살'시키는 전쟁상황으로 나아갔습니다. 인간 이성이 있었다면 제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전후 60년에 바짝 다가서고 있습니다. 인간은 60년이면 한 세대가 사라지긴다고 하며 결국 전세대의 '경험'이 생생한 '기억'으로 작용하는 것은 60년이라 하죠.
양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인류역사상 그나마 '나은' 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성립시켰습니다. 보편교육과 보편의료는 인간 2000년 역사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지금 중국에서 보듯. 그나마 괜잖은 것들을 모두 무너뜨리면서 오늘의 지구는 '자원탕진'의 한길로 들어선 것 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발명품 중에서 아주 그럴듯한 '금융'이 한계에 이르면서 제2차대전 전의 10년과 같은 상황으로 전지구적 이행의 가능성이 높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임마뉴엘 칸트의 책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에서, '부자'가 되는 꿈은 사실 화석연료를 과잉낭비하면서 '잉여생산물'을 축적할 수 있는 현 시대의 산물에 불과할 뿐임을 암시합니다. '유기체'는 자신의 존속과 유지를 목적으로 합니다. 부자가 되는 꿈 보다 '생존'과 '존속'이 더 중요하죠. 그리하여 '시장의 자유'는 결국 제한될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그 제한이 다른 '자유'의 제한까지 이어질 것인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눈꼽 만큼의 '이성'이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며 결국은 아주 편리한 수단 -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 의 사용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