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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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좋았다.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배깔고 누워 어른들의 이런저런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작가 생전에 쓴 에세이들 중에 35편을 추려낸 책이다. 몇몇 글은 다른 책에서 읽은 것이기도 했다. 난 이 책이 좋았던 게 참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을 안 읽어봤더라도 누구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작가 '박완서'가 아니라 한 인간 '박완서'의 냄새가 나는 글들이었다. 누군가의 딸이자 손녀,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였고 자신의 편견과 인색함을 부끄러워하고, 여자라서 겪는 수모에 억울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죽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 나이듦에 당황해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 살다가는 한 인생을 어떻게 잘 정리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좋았다.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좋아서 많이 울컥했다. <행복하게 사는 법>, <내 식의 귀향>,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마음 붙일 곳> 글이 참 좋아서 별도로 표시해뒀다.  페이지를 다 넘기고,


1931.10.20 ~ 2011.01.22 


를 보았을 때 그 감정은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의 생은 그가 소망한대로였을까?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많이 울었다.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갔을 때  쓴 글이 참 좋아서 남겨본다.



정 회장은 정 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 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  p.256「내 식의 귀향」



가을이 오면 겨울을 날 연탄 걱정을 하느라 순수하게 가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마지막 글 <그 때가 가을이었으면> 중 마지막 부분을 남겨본다. (내가 가을을 제일 좋아해서인지 가슴이 찌르르 했다.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허둥대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두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허락된다면 그때는 언제쯤일까. 10년 후 쯤이 될까, 20년 후쯤이 될까, 몇 년 후라도 좋으니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싶다.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 |  p.286 「그 때가 가을이었으면」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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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에 있어요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박우주 옮김 / 달로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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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에 있어요 - 아오야마 미치코

"뭘 찾고 있지?"

구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 내 작은 도서실에 가면 어쩐지 사람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열게 하는 목소리로 저렇게 묻는 사서 고마치 사유리가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필요한 책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과 함께 특별한 '책 처방'을 추가하는 사서. 사람들은 그녀가 찾아준 레퍼런스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쩐지 그 속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찾는다. 설정이 지극히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난다. 사서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양모 펠트' (양모로 귀여운 인형을 만드는 것)인데 책 처방과 함께 특별 부록을 주는 묘한 사서라는 설정이 독특하다. 그리고 일단 서점대상 2위라는데, 서점대상 좋아한다.

"아아, 사키타니 씨도 회전목마에 올라타 있군요. 흔히 있는 일이에요. 독신인 사람이 결혼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결혼한 사람이 아이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리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독신인 사람을 부러워하죠.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참 재밌어요. 저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뒤꽁무니만 쫓느라 일등도 꼴찌도 없답니다. 즉 행복에는 우열도, 완성체도 없다는 얘기죠." │p.199

다섯 인물의 이야기가 각 챕터 별로 이어진다.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여성복 매장에서 일하는 도모카, 오랜 꿈이 있지만 실행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료, 임신과 출산으로 쌓아온 커리어를 잃어버린 나쓰미, 꿈을 간직한 채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히로야, 한평생 일해온 직장을 정년퇴직하고 남은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은 마사오의 이야기가 차례로 나온다. 각 이야기가 따로인 듯하지만 묘하게 인물들 간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이 재밌는 점이기도 했다.

"인생이란, 항상 복잡하게 꼬여 있는 거예요. 어떤 환경에 있든 뜻대로 되지 않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살았다!'라고 생각할 때도 정말 많으니까요. 계획이나 예정이 꼬여버리는 일을 두고 불운하다거나 실패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변해가는 거죠. 나도, 인생도." │p.199

어떻게 보면 책 속 인물들의 고민은 세대별로 가지는 보편적인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일까, 나의 고민은 어쩌면 별것 아닐 수 있다는 식의 간편한 해결은 일본 소설의 특이점 같기도 하지만 난 그래서 좋을 때도 있다. 주기적으로 읽는 편이다. 그냥 가끔은 복잡한 내 생각이 우스울 정도로 심플한 이야기가 기분 좋게 읽힐 때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저는 무언갈 알고 있지도,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모두들 제가 드린 부록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죠. 책도 그래요. 만든 이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부분에서 그곳에 적힌 몇 마디 말을, 읽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연결 지어 그 사람만의 무언갈 얻어내는 거예요." │p.368

* 사서가 양모 펠트를 하는 모습(바늘로 계속해서 쿡쿡 양모를 찌르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저주를 거는 건가, 또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가 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양모 펠트는 나도 해보고 싶었던 공예분야인데,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렇게 보일 수 있겠다 싶어서 너무 웃겼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아, 사키타니 씨도 회전목마에 올라타 있군요. 흔히 있는 일이에요. 독신인 사람이 결혼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결혼한 사람이 아이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리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독신인 사람을 부러워하죠.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참 재밌어요. 저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뒤꽁무니만 쫓느라 일등도 꼴찌도 없답니다. 즉 행복에는 우열도, 완성체도 없다는 얘기죠."
- P199

"인생이란, 항상 복잡하게 꼬여 있는 거예요. 어떤 환경에 있든 뜻대로 되지 않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살았다!‘라고 생각할 때도 정말 많으니까요. 계획이나 예정이 꼬여버리는 일을 두고 불운하다거나 실패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변해가는 거죠. 나도, 인생도.
- P199

"하지만 저는 무언갈 알고 있지도,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모두들 제가 드린 부록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죠. 책도 그래요. 만든 이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부분에서 그곳에 적힌 몇 마디 말을, 읽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연결 지어 그 사람만의 무언갈 얻어내는 거예요.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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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
토머스 새비지 지음, 장성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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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 - 토머스 새비지


아, 재밌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별 흥행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베네딕트 컴버베치를 주연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12월에 공개된다고 해서 꼭 읽어봐야지 싶었다. 오이씨라면 무조건 봐야지! 서부의 냄새가 물씬 나는 배경에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서부의 생생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도 재밌었다. 필의 비중이 높긴 하지만 필과 조지 두 형제의 이야기다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요 네스뵈의 킹덤이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을 요 네스뵈가 썼다면 800페이지는 거뜬히 넘을 텐데 하는 생각도.


서부의 황량하고도 거친 느낌이 잘 느껴지는 이 이야기는 천 마리의 소가 있는 버뱅크 목장의 이야기이며 목장을 운영하는 필과 조지 형제의 이야기다. 형 필과 동생 조지는 마치 정 반대의 사람처럼 다르다. 형 필은 날렵하고 매우 똑똑하며 못하는 것이 없었고 강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목장주이며 동생 조지는 그에 비하면 똑똑하지도 못하고 느리지만 대신 꾸준한 성격이다. 비록 사람들을 재밌게 하지 못해서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필과는 다르게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어 아량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정반대의 사람이라 둘은 짝꿍 같은 각별한 사이다.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꽉 잡고 가는 인물은 형 필인데 이 사람은 나쁜 사람 같기도 하고 또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하고 정말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혐오를 감추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며 감정을 감출 생각도 전혀 없다.


어느 날 동생 조지가 남편을 잃고 홀로된 로즈와 결혼했다며 버뱅크 가로 데려오면서 이야기가 재밌게 흘러간다. 버뱅크 가에 온 첫날, 어려운 아주버니 필에게 인사말을 건네자 필이 차갑게 웃으며 한 말은 " 누구더러 아주버님이래."였다. (덜덜덜) 누가 시누이가 무섭다고 그랬나요? 아주버니가 훨씬 무섭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알았어요.... 이때부터 로즈의 '필'살이는 시작된다. 말 한마디 섞지 않고 그저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필, 이야기가 진짜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읽는 나도 너무 불안했고 로즈뿐 아니라 나도 신경쇠약에 걸린 느낌이었다. 로즈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피터가 있다. 아빠를 닮아 똑똑하고 명철한데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런 아들. 필은 '암사내'라고 부르며 피터에게도 모욕을 주었는데 거친 남자들의 세계 서부라는 장소적 배경과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긴 했지만, 필이 참 어려운 인물이라 생각했다. 좋든 싫든, 읽는 내내 필에 대한 호기심을 끊을 수가 없었고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종잡을 수 없는 피터란 인물도 불안하고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이끄는 데 한몫했다. 마지막 결말은 놀래버렸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필이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뾰족하고 예민한 성격은 지난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완벽한 필, 모든 사람 위에서 군림했고 실제로 그럴 자격과 실력이 있었던 필이 유일하게 거부당했던 경험이자, 우러러보는 대상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그 경험 말이다. 자업자득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내 필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지만 책이 끝났음에도 필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들지 않은 느낌이다. 더 알고 싶다. 정말 재밌었다. 그래서 오이씨가 해석한 필은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


* '애버크롬비 앤드 피치'를 '애비 에미 앤드 새끼' 라고 한 것은 정말 웃겼다.

필은 예리하고 예민하고 호기심이 강한 정신 ㅡ 명철한 정신 ㅡ 의 소유자였기에 소를 사러 온 상인이나 외판원을 당황케 했다. 그들은 필처럼 옷을 입고 필처럼 말하는 사람, 필 같은 머리와 손을 지닌 사람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까막눈일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을 잘 모르던 사림들은 그의 습관과 외모 덕분에 귀족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을 고쳐 자기 멋대로 사는 귀족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 P19

있잖아요...... 필 저 자식은 좀 외로움을 타는 거 아닐까요? 아까 우리끼리 있을 때 얘기했잖아요, 저런 자식이 평생 누구한테 사랑받은 적이 있을 것 같아요? 저 자식도 누굴 사랑한 적이 있을까요? - P23

가끔 필은 모든 사연을 다 털어놓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그가 술을 증오하는 한 가지 이유였다. 그는 술이 두려웠다. 술에 취해 무심코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사연이. - P30

아버지라, 조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맙소사, 얼마나 무거운 말이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 P64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어째선지 조지에게도 화가 났다. 그들은 언제나 친한 사이였고 자신의 삶으로 상대의 삶을 더없이 보완해 주었다. 한쪽은 날씬하고 한쪽은 퉁퉁했으며, 한쪽은 영리하고 한쪽은 꾸준했다. 그렇게 일란성 쌍둥이 같은 사이였기에 필은 동생에게 솔직해질 수 없을 때 짜증이 났다. 왠지 갈피를 잃어버린 느낌에 화가 났다. - P99

저기, 필 아주버님, 마침내 로즈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있으니까 참 좋네요. (...) 웃음을 머금은 채로, 로즈를 보며 똑똑이 말했다. 누구보고 아주버님이래. - P137

필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로즈는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그저 남모르는 문제를 지닌 인간일 뿐이라고. 그러나 벼랑 끝에서 비틀거릴 때, 외줄 위를 걸을 때, 로즈는 그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것을 깨달았다. 아니면 인간보다 아득히 미미한 존재이거나. 인간의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 P279

필도 소년의 적나라한 본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원 같은 시간 동안 야유와 조롱을 견디며 열린 천막들 앞을 당당하게, 숨김없이 걸어가던 소년을...... 세상에서 추방된 자를. 그러나 필은 알았다, 뼛속 깊이 잘 알았다. 추방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그래서 그는 세상을 혐오했다, 세상이 먼저 그를 혐오했으므로.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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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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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의 노크 - 케이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재밌었다. 처음부터 몰입이 확 될 수밖에 없었던 게 내가 겪은 상황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낙후된 지역의 다세대 건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여성들만 여섯 가구 살고 있는 3층(301호~306호)이 배경이다. 어느 날 303호 여성이 만나는 남자가 계단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되고 죽기 6개월 전에 보험에 들었다는 이유로 경찰 수사에 들어간다. 첫 파트에서는 각 세대별 여성들의 참고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각 여성들이 하는 일, 성향, 관계나 소문 같은 것들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세대별 여성들이 각자 자기 얘기를 하고 마지막엔 에필로그로 끝나는 구조다.


모두 사회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인데다 뭔지 모를 비밀스러운 느낌, 또는 불쾌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건물에 사는 여성들 중 302호에게 가장 이입하며 읽었는데 302호는 옆집 303호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을 넘어선 사적인 소음까지 들으며 예민한 하루하루를 지낸다. 실제로 나도 옆집의 다채로운? 소음 때문에 고생을 했기 때문에 너무 이입하며 읽게 되는 거다. 이런저런 소리를 듣다 보면 아무리 상상력이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도 다양한 상상을 펼치게 된다. 마치 그게 눈으로 본 사실인 것처럼 명확하게 말이다. 실제로 그녀가 진술하는 내용에서 예전에 내가 블로그에 옆집 소음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거기 내용과 아주 흡사한 내용이 나와서 내가 쓴 줄 알았다. (알고 보면 케이시가 나의 또 다른 자아..? 소오름)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밤일을 한다고 소문이 난 301호, 3층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너무 외로움을 타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302호,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듯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303호, 집안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서 두문불출하며 보내는 지적장애 3급의 304호, 엄청난 문신으로 보는 사람들마다 놀래는 305호, 건물 관리를 하며 아무 월세로 사는 건물주의 친척이자 세입자들 호박씨 까는 게 취미인 306호까지, 아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한 느낌. 후반에 가면 오? 엥? 으잉?!!!! 하면서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휘몰아친다. 진짜 재밌었다.

처음에 펍 스테이션으로부터 리뷰 제안이 왔을 때 나는 외국 작가의 추미스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 작가였고 작가가 직접 전자책을 제작해 서점에 등록했고, 영화 판권 계약까지 이뤄냈다고 한다. 작가 소개 글에 작가는 가벼운 난독증이 있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소설을 읽는 데 힘이 들었던 작가가 원룸촌에서 살았던 경험을 등장인물에게 이름 대신 숫자를 붙여 이야기로 완성했다고 한다. 씁쓸하다. 같은 경험을 한 누군가는 장편소설을 완성해내고, 나는 그냥 추억으로? 간직하고.... ㅋ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다음 책이 나오면 그때도 읽어보고 싶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꿈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죠. 상상으로 시간을 메워가는 방법이 현재를 견디기엔 가장 좋은 처방이었어요. 과거는 혐오스럽고, 현재는 답답하고 지루해서 오직 미래만 붙잡고 살았어요. - P45

한마디로 끈적이는 동네예요. 장사 안 되는 식당 주방처럼 찌든 때가 여기저기 붙은 곳이죠. 바퀴벌레나 쥐도 많아요. 사람들이 뿜어내는 우울한 기운이 끈적이는 형태로 변한 것처럼 우울, 슬픔, 비루함, 분노, 모든 것이 뒤섞여 끈적거려요. - P51

삶은 삶 자체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죽음이 내포돼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계속 연결되는 흐름입니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이어져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이 있는 하루도, 시작과 끝이 있는 삶과 사랑도, 끝없이 시작과 끝이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시작보다 끝의 에너지가 큰 동네입니다. 겁에 질려 머뭇거리며 시작했다가 공포가 집어삼켜버리면서 막을 내리는 것이지요. 시작과 끝, 그리고 다시 시작이 이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계속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곳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공포와 자괴감, 모멸감뿐입니다. 결국에는 자기혐오로 이어져 삶이 나아가지 않고 정체돼버립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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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단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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