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단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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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선샤인 어웨이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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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선샤인 어웨이 - M.O.월시(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이 책은 시작부터 '강간'이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에두를 생각도 없는 듯해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으로 금방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화자는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회고이자 고백이다.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 화자는 과연 범인인지, 아니면 누가 범인인지, 듣는 이는 누구인지 궁금해하면서 금방 읽게 된다. 배경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 초반 배턴루지라는 지역이며 어린 시절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에서 어느 날, 린디라는 여학생이 강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자체도 그렇지만, 이것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 이유는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일이 적은 지역 특성상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냈던 누군가가 범일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또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주요 용의자로 거론된 네 명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화자도 그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읽다 보면 화자가 범인은 아니겠구나 하는 감이 오지만 화자는 화자대로 린디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 사건에 집착하고, 죄책감을 가진다.

/ 내가 지금까지 내 삶에서 일어난 그 어떤 끔찍한 사건 앞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누나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을 위로해 주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떠날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린디를 위로해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애한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에 나는 내가 그 애의 슬픔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해결한 적이 없었다. 그 순간까지 내가 그리 고결한 인간으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p.356)

린디를 사랑하는 소년은 무지해서 되려 상처까지 주었다. 소년은 자신이 준 상처와, 자신의 무지와, 떳떳하지 못했던 집착,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자란다. 생각해 보면 용의자가 된 일과 부모의 헤어짐, 가족의 죽음과 같은 큰 사건들이 함께 일어나 이 소년에게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이 고백을 듣는 상대가 누군인지, 어째서 이런 과거 이야기를 회고하게 되었는지, 범인은 누구인지도 알게 되지만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속 시원하게 끝날 일도 아니고 말이다. 끝내 그 일이 한 사람의 일상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는지에 대해 아는 것, 이해하는 것일 거다. 화자의 고백이야 어찌 됐건 린디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더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화자 역시도 고백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리라고 본다.

/ 나는 우리의 시작이 순조로웠으면 해. 나는 우리 둘이 이 세상 속에서 좋은 남성으로 살아갔으면 해.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할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네가 이해하길 간절히 바라. (p.423)

이 책을 읽을 때 다소 불편할 수 있음을 이야기해야겠다. 화자는 사건이 있었던 당시를 회고하고 있으므로, 한창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남학생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너무 좋아해서 집착적이기까지 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고 성적 욕망은 들끓기 시작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지식은 없이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의 관점임을 수시로 다시 상기시키면서 읽어야 했다. 오히려 이 부분은 뒤에 수록된 작가와의 인터뷰를 읽고 더 공감이 갔다. 위험과 관련해서는 남녀가 경험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서 그랬고, 남부라는 지역색과 전반적인 작품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저자의 생각을 잘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어째서인지 인터뷰가 더 마음에 들고 와닿았다. 작가님, 참 말을 잘 하시네.(끄덕끄덕)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점점 더 많은 손님들로 부산해지는 우리 집에서 내가 배운 단 한 가지 교훈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겪고 있는 비극은 내가 아무리 옆에 있다 해도 다가갈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손님들이 내게 확실히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 P211

삼촌이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단다. 그 애랑 이야기할 일이 생기거든 가서 그 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렴. 사람들이 하는 ‘터프하게 굴어야 해‘, ‘세심하게 굴어야 해‘ 따위 헛소리는 믿으면 안 돼. 그냥 그 애가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두려무나. 그러면 좋은 사람은 너한테서 좋은 면을 보고, 나쁜 사람은 나쁜 면을 볼 테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니? 넌 빈 캔버스란다. 그림을 그리는 건 상대의 몪이야.
- P224

어머니는 내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었지만 나는 곧장 짜증이 났다. 부모들은 아무리 좋은 의도건 간에 진실을 창피한 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렇다.
- P243

나는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죄가 있다. 내겐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돕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때의 결심이 나라는 사람 그 자체라고 느끼며 내 죄를 목걸이처럼 걸고 살았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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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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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 이디스 워튼

이 책은 중편 <버너 자매>와 단편 <징구>, <로마열(熱)> 을 포함한 이디스 워튼의 중단편선이다. 특히 <버너 자매>는 국내 초역이라 너무 읽어보고 싶었다. 와, 앞 부분만 조금 읽으려고 펼쳤다가 멈출 수가 없어서 다 읽어버렸다. 다 읽어갈 때쯤에 남자친구가 집에 왔는데 인사만 잠깐 하고서 거의 다 읽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을 정도로 재밌었다. 지난 여름에 <여름>을 처음 읽고 좋았는데 이제는 완전히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순수의 시대>, <기쁨의 집> 등 썼고 이디스 워튼을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

올여름에 이디스 워튼의 <여름>으로 작가를 알게 됐다. 푸른 녹음과 눈부신 햇빛, 시원한 박하향의 여름 속에 있는 기분이다. <여름>이 시골의 여름 풍경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면, 이 책 <버너 자매>는 특히 감정 묘사가 아주 탁월했다. 진짜 반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안다. 내가 너무 극찬을 하는 바람에 이 후기가 어쩐지 조금 유치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싶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 그녀의 시간을 채워 주곤 했던 소소한 일상이 이제는 미치도록 무의미해 보였다. 처음으로 지루한 삶에 몸서리쳤다. (p.25)

<버너 자매>는 18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버너 자매는 뉴욕 거리의 작은 가게에서 수예품 등을 판매하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언니 앤 엘리자가 동생 에블리나에게 생일 선물로 탁상시계를 선물하는 것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시작되고 만다. 두 자매의 작은 세계 속에 시계방 주인 래미라는 남자가 들어오게 된 것인데, 이후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쓰고 싶어서 입이 아니 손이 근질근질 거리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마치 아침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자극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이야기기 때문에 꼭 읽으면서 재미를 느껴보라 말하고 싶다. 생일 선물을 주며 서로를 위하는 자매의 모습을 볼 때만 해도 마치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는 것처럼 사랑스러웠는데 래미라는 남자 때문에 자매에게 균열이 생긴다. 언니 앤 엘리자의 사랑에 빠진 감정 묘사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동생을 보며 느끼는 질투, 시기의 감정 표현이 기가 막혔다. 동생을 너무 아끼면서도 질투하게 되고 또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하는 언니 앤 엘리자의 감정에 푹 빠져 읽었다. 장편이 아니라 중편이어서 그런지 이야기의 진행, 속도감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느낌이다. 이후의 파란만장한 자매의 이야기는 꼭 책으로 읽어보면 좋겠다. 염세적인 느낌 한 스푼을 가미한 비극적 결말까지.

/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유익을 내려놓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인생의 선물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물이 그녀가 양보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에게 익숙한 천국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앤 엘리자는 더는 하느님이 선량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p.127)

<버너 자매>는 당시의 윤리 기준이나 진보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의 감수성에 맞지 않다 해서 번번이 거절당한 원고라고 한다. 그래서 출간되기까지 24년이 걸렸는데 그것도 징구와 다른 이야기들에 함께 수록되어 출간된 것이라고 한다. 궁핍 그리고 비참한 삶, 그리고 결코 긍정적인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결말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버너 자매뿐 아니라 이 책에 함께 수록된 <징구>와 <로마열(熱)> 또한 짧지만 강력한 단편이었다. <징구>는 지식인인 체 하지만 속은 텅 빈 인물들로 이루어진 독서모임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으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싶을 정도로 우습다. "징구였죠?" 아주 천연덕스럽고 비꼬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다. 마지막 <로마열(熱)>은 또 어떤가. 언뜻 보기에 친해 보이는 두 여인이 나온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시시각각 하는 말마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 숨어있고 곧 이들의 위선적인 관계는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엔 폭탄을 던져주고 끝난다. 짧지만 이렇게 강렬하고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다니! 좋아합니다, 작가님.

이디스 워튼을 얘기할 때 제인 오스틴을 함께 얘기하는 분들이 많아서 찾아보니 제인 오스틴(1775~1817), 이디스 워튼(1862~1937)으로 동시대의 작가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다양한 인물들의 속내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제인 오스틴이지만 사교 파티의 낭만과 결혼이 지겨워질 때가 있는 반면 이디스 워튼은 시시각각 흥미롭다. 읽는 재미가 훨씬 크다. 상황이나 장소에 대한 묘사, 그리고 감정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나 멋진 고전이라니. 다른 작품도 어서 읽어보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 태양에 한 뼘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음산한 구름이 하늘을 덮은 그날 아침은 습하고 추웠지만, 아직은 눈송이가 어쩌다 떨어질 뿐이었다. 이른 아침 빛에 길거리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처럼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책임질 필요 없는 더러움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상관하지 않는 앤 엘리자에게 길거리는 이상하리만큼 친근해 보였다. (p.23) - P23

거친 난간 너무 저 멀리 땅이 움푹 파였고, 푹 꺼진 곳에는 작은 숲이 있었다. 그 더운 일요일 오후,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싱그럽고 고요했다. 사과나무 가지들 밑으로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앤 엘리자는 교회에서 보내던 조용한 오후와 어렸을 적 엄마가 불러 주던 찬송가가 생각났다.
- P61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한 사실이 겁이 났다. 뒷날 돌이켜보니, 앤 엘리자에게 그날 오후의 고독은 무엇인가를 예언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앞으로 내세에서 맛볼 고독의 에센스를 증류하는 것 같았다.
- P75

앤 엘리자는 그들의 친절을 당연히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위로‘라 믿고 건네는 말들은 그녀에게 빈 껍데기와 같았다. 그녀는 익숙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 바로 저편에 ‘고독‘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봤다.
- P88

누구든 독립적인 삶을 ‘아내‘라는 달콤한 이름과 바꾼 사람이라면,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해. 그리고 나는 언니의 삶이 한여름 구름처럼 속박 없고 평온하길 바라.
- P91

그녀의 시간을 채워 주곤 했던 소소한 일상이 이제는 미치도록 무의미해 보였다. 처음으로 지루한 삶에 몸서리쳤다.
- P25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유익을 내려놓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인생의 선물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물이 그녀가 양보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에게 익숙한 천국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앤 엘리자는 더는 하느님이 선량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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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지음, 신복룡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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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웅 열전이자 유럽 역사의 초창기를 이끈 위대한 정치가와 장군들의 삶을 기술한 것이다. 지도자들의 처세와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한 번에 배울 수 있는 교양 백과사전으로 꼽힌다. 나폴레옹, 처칠과 같은 정치가나 군인, 몽테뉴와 루소 등 여러 지성인들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비롯한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동양의 삼국지와 곧잘 비견되는 책이며, 서양의 정치 문화부터 예술 창작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가르침을 안겨주며 유럽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되는 고전이다. 베토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괴로울 때 이 책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디자인

기존에 출판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는 다른 느낌의 디자인이 내 관심을 더 끌었다. 와, 알고보니 내가 엄청 좋아하는 <워크룸 프레스>에서 디자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역시! 먼저 디자인을 얘기해 보자면 눈에 확 들어오는 선명한 컬러감이 인상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영웅들의 옆모습이 심플하게 자리 잡고 있다. 책 소개만 봤을 때는 표면의 질감을 알 수 없었는데 책을 받아 실물을 보니 질감이 느껴졌다. 질감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느낌이 영웅들의 옆모습과 잘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본문 폰트는 예스러운 느낌이 나기도 하고 캐주얼한 느낌도 나서 너무 무겁지 않다. 전체적으로 현대적인 느낌이면서 고전의 느낌이 잘 어우러진 책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기존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느껴지는 묵직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현대적으로 바꿔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디자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전권 소장하고 싶어진다.



첫 부분에 번역자의 말이 나온다. 아주 오랜 고전인 만큼 세계적으로 다양한 번역본이 있기 때문에 어떤 번역본을 참고했는지에 대한 설명들이 나온다. 출간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역자의 말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었다. 1권에는 열 명의 영웅들이 나온다. 테세우스, 로물루스로 시작해 리쿠르고스, 누마, 솔론, 푸블리콜라, 테미스토클레스, 카밀루스, 아리스티데스, 대(大)카토까지. 그리고 두 명씩 끊어서 비교한 글이 사이사이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도 아직 안 읽어본 나는 처음에 익숙지 않은 이름과 지명에 혼돈스러웠다. 그나마 몇 개 안되는 아는 이름도 입시 미술을 하면서 석고상들로 봤기 때문이었다. 글자가 눈으로 들어와 뒤통수로 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금세 익숙해져서 리쿠르고스부터는 아주 재밌게 읽었다. 리쿠르고스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그때부터 집중이 잘 되고 페이지도 잘 넘어갔다. 1권을 다 읽은 지금도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리쿠르고스다. 그리고 누마, 아리스티데스가 순서대로 인상적이었는데, 아리스티데스는 리쿠르고스를 아주 존경하고 따르고자 했다니 역시 리쿠르고스가 인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이지만) 열 명의 인물들을 다 요약하긴 그렇고 내가 제일 좋았던 리쿠르고스와 아리스티데스에 대해서만 간략히 적어본다. 아, 덧붙이자면 가장 별로였던 인물은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해상 전쟁에서 활약했다고는 하나 천성이 욕심 많고 모함하는 것 밖에 모르는 지질한 사람이었다. 이것 역시 아리스티데스 설명과 함께 이야기하겠다. 아,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 못지않게 이상한 사람은 마지막의 (大)카토 였다. 뭔가 청렴하고 고결한듯 하지만 알고 보면 옹졸하고 인색하고, 공치사는 어찌나 잘하는지 자기 자랑 하기 바쁘고, 지나친 권력욕과 정욕으로 이름을 깎아먹는데 말하는것만 보면 굉장한 성인처럼 군다는 게 너무 이상한 사람 같았다. 테미스토클레스하고는 카테고리가 다른 이상한 사람.


리쿠르고스[기원전 9세기]

리쿠르고스의 꿈은 자기 조국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행복은 덕성이 넘치고 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 사이가 화목한 데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p.218)

리쿠르고스는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어놓고 섭정으로서 왕권을 행사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각 나라의 좋은 법과 체계를 가지고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원로원 체제를 확립해 안정과 중용을 꾀하고 토지 재분배로 가난과 재산의 불평등을 제거하며 시샘, 범죄, 사치를 몰아냈다. 꽤 과격하긴 하지만 공동식당을 만들어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식사했고 사치, 식탐 등 과욕을 없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온화하고 공의로운 성격으로 평화를 사랑하였으며 올림픽 기간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했다. 여성을 젊은 남자에 못지않게 단련시킴으로써 나약함과 섬세함에서 벗어나게 했다. (스파르타 영화 속 강인했던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 외국인들을 거의 몰아내다시피했는데, 이는 그들이 스파르타인의 덕성을 배워가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스파르타인들에게 악행을 가르칠까 걱정해서였다. 읽다 보면 너무 좋은 지도자인 듯한데 또 가만 생각해 보니 사회주의가 이롭게 작용하면 이렇게 되는 걸까? 싶었고 아마 사회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상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이었는데,

그의 유언은 스파르타가 아닌 죽은 곳에서 화장되어 재로 뿌려지는 것이었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정치 제도를 고치지 않고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시체라도 돌아가면 법을 바꾸어도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p.220)

⭐ 리쿠르고스는 어느 날 신탁을 받기 위해 떠나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왕들과 원로원 의원들, 민중에게 자신이 제정한 법들을 꼭 지키겠노라 약속받았다. 자신이 행한 일들이 훌륭했으며 체제를 계속 지켜나가는 한 스파르타는 높은 영예를 누리며 지속되리라는 신탁을 받은 리쿠르고스는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민중이 법을 지키겠다 했으므로 돌아가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고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었다. 그로부터 500년간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의 법을 지켰다. 이렇게 오래도록 지켜진 이유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리쿠르고스가 수련과 교육을 통해 소년들의 성품 속에 법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마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역시나 평화로운 나라를 이루고 훌륭했으며,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누마의 제도는 튼튼한 교육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오래갈 수 없었다. 리쿠르고스는 민중에게 존경받음과 동시에 이웃나라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너무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정치인들을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키는 법과 제도가 과연 있을까 생각했는데, 기록에 남는 걸 읽는 게 다라 확실히 알 순 없어도 리쿠르고스는 꽤나 근접했던 모양이다. 물론 노예에게 가혹했던 점이나 헬로트족에게 행한 가혹행위를 나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완벽한 지도자가 세상에 있으랴.

아리스티데스[기원전 530 ~ 468]

리쿠르고스가 인상적이었던 만큼 아리스티데스도 인상적이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리스티데스는 리쿠르고스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역시..) 어려서부터 심지가 굳고, 의협심이 있으며 천박한 행동이나 속임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옳지 못한 일에 엮일까 봐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혼자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테미스토클레스와는 어릴 때부터 자주 부딪혔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소년을 동시에 사랑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극과 극인 천성으로 인한 것이었던 듯하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의롭게 처신하려 노력했으며 명예에 들뜨지 않고 역경에도 차분했으며 돈이나 명예 같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이의 훌륭한 의견을 적극 수용할 수 있었다. 내가 테미스토클레스가 제일 별로였던 이유는, 충동적인 천성이나 여흥을 좋아하고 헤펐던 점, 나랏돈을 횡령해 부를 축적한 점도 있지만 사사건건 아리스티데스의 의견에 반대하고 빈정거렸으며 모함하여 추방당하도록 하는 등 한결같이 지질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리스티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안건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내가 성실하고 영예롭게 업무를 수행할 때는 나를 비난하고 고발하더니, 이제 도적들에게 공금을 나누어 주니 나를 선량한 시민으로 보는군요. 나로서는 지난날 여러분에게 고발당했을 때보다 지금의 삶이 더 부끄럽습니다. (p.496) - 국고 감독관에 선출된 아리스티데스가 동료들과 테미스토클레스의 횡령을 알아내자 테미스토클레스가 모함하였다. 그 후 아리스티데스가 엄격한 지난날을 후회하는 시늉을 하며 엄격하게 감독하지 않았더니 부패한 관리들은 기뻐했다. 그제서야 아리스티데스를 추어올리면서 민중을 설득하고 다시 감독관이 되도록 투표하려 하자 아테네 시민을 꾸짖으며 한 말.

늘 자신을 모함하는 테미스토클레스였지만 아리스티데스는 그렇지 않았다. 전쟁에서는 대의를 위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여러 전쟁에서 현명한 판단과 설득으로 아테네의 승리를 이끌었다. 병사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 정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했다. 아테네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지만 자신은 원래 갖고 있던 재산만으로 검소하게 생활했다. 그렇게 청빈한 생활을 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한 사람도 테미스토클레스였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같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기의 행복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그가 잘 나갈 때 그를 부러워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청빈하게 살았던 그는 장례비조차 남기지 않아 시민이 국고로 무덤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그의 자식들까지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아리스티데스가 칭송을 받자 테미스토클레스가 빈정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장군의 가장 훌륭한 덕목은 적군의 계획을 꿰뚫어보는 것이지요.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테미스토클레스 장군, 그 말이 맞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영예로운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장군이라면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p.529)




플루타르코스는 다양하게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모아 서술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어째서 그런지 설명해 주고 연대나, 동시대 인물을 고려하여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를 알려준다. 처음에는 그래서 혼돈스럽기도 했지만 읽다 보면 역시 익숙해진다. 어려운 마음 가득 긴장하며 시작한 책이지만 재밌게 읽었다. 도전하길 잘했다는 생각. 각 인물마다 정치적, 개인적 신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펼친 정책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지도자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어땠는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읽다 보니 그들도 인간이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시민들을 위한 훌륭한 법을 제정하고 전쟁에서 조국을 지키고 청렴한 생활을 하는 등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이고 자만에 빠져 교만해지고 폭력을 행사하고 상대를 모함하거나 국고를 자신의 재산으로 축적하는 등 어리석고 불완전한 모습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정치, 정부와 시민들의 관계는 현대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일이어서 전혀 새롭지 않았는데, 그래서 또 재밌는 거다. 아주 오래된 고전이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지도자들의 훌륭한 어록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게 된다. 나처럼 도전할 엄두를 못 냈던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리쿠르고스의 꿈은 자기 조국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행복은 덕성이 넘치고 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 사이가 화목한 데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 P218

그는 온 나라가 지혜를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정치 제도를 수립한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명성을 얻었다. - P219

그의 유언은 스파르타가 아닌 죽은 곳에서 화장되어 재로 뿌려지는 것이었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정치 제도를 고치지 않고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시체라도 돌아가면 법을 바꾸어도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 P220

음식을 끊고 죽으면서 정치인은 죽는 일도 국가에 도움이 되어야 하므로 자기의 죽음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덕스러운 행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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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권여름 지음 / &(앤드)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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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 권여름(넥서스앤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봉희'는 '구유리'가 원장인 단식원(구유리 건강 힐링센터)의 코치이며 이야기의 전체 배경도 이 단식원이다. 어느 날 봉희의 관리하에서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굳건히 다이어트에 임하던 '운남'이 단식원에서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운남은 단식원과 연계한 한 유튜버의 채널에서 다이어트에 관한 컨텐츠 촬영으로 화제를 몰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버렸으니 이것은 프로그램에도, 단식원에도 또 봉희의 관리 책임 능력 면에서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저 다이어터와 코치라는 것 말고는 전혀 아는 게 없는 사이, 봉희가 운남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식원의 사람들은 거의 취후의 수단으로 단식원에 들어온다. 단식원을 나가는 순간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런 이유로 단식원이란 곳은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이다. 평생을 거절당하며 업신여김을 받았던 봉희 역시 운남처럼 이 단식원에서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코치가 됐다. 봉희에게 이 단식원은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곳이자, 유일하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봉희에게 단식원 바깥의 삶은 살찐 몸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또다시 실패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단식원이라는 극한의 곳에 찾아올 정도로 절실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상업적으로 취하는 원장의 모습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다. 그저 화젯거리로 소비하려고 하는 유튜버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사라졌던 운남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봉희는 어떻게 행동할까를 읽어보길 바란다.  

내 생각에 다이어트는 안 할 순 있어도 마지막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다. 감량 후의 유지기도 다이어트다. 어떤 강도로 지속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래서 다이어트에 성공해도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평생 관리하며 조절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욕구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스스로가 잘 조절하지 못하는 충동적인 현상에 대해서 '본능'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곧잘 얘기한다. 그 당연한 게 나는 늘 그게 궁금하다. 내 몸이면서도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그것, 무한한 만족감을 주기도 하고 좌절감과 패배감을 느끼게도 하는 그것 말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는 해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서 그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또는 읽는 사람 각자의 경험을 비롯한 다양한 감상들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몸은 복수의 화신이다. 잘 당하지만 당한 만큼 보복한다. 어설프게 덤비면 원래 몸무게에 5kg 정도의 살덩이를 더 얹어 강한 펀치를 날린다. 그걸 몇 번이나 겪었기에 다이어트를 시도하지 못하는 상황일지 모른다. 무기력과 자책, 자신의 몸에 대한 무례한 반응이 준 상처가 한데 섞여 더 깊은 우울을 만들었을 것이다. - P42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의 표정이 봉희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시에 저 예의 없는 한마디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모르는 사람이 던지는 무례한 시선과 폭력적인 말들. 그것에 노출되었던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 P42

푹 익은 아욱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짠 듯도 해서 하얀 밥알을 젓가락으로 한 꼬집씩 몇 번 집어먹었다. 밥알을 씹자 단물이 나오면서 입속은 난리가 났다. - P59

어쩌면 송동만의 말처럼 자신은 끝에 가서 결국 실패하고 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부지런을 떨고 앞서가다 결국 마지막엔 실패하는 삶, 그게 자기 삶의 패턴이 될까 봐 봉희는 늘 두려웠다. - P72

몸이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어림없었다. 봉희에게 살찐 몸은 마치 낮은 신분과도 같았다. 유능하고, 가진 게 많아도 뚱뚱한 몸을 걸치고 있는 이상 늘 위축되고 구속될 터였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봉희는 그걸 알았다. - P75

말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요요를 겪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충격은 분노로 바뀌고 그 화살은 결국 오롯이 자신에게 돌아간다. - P118

영리하고 재빠른 사람은 역시 불편했다. 쉽게 속을 내비치는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귀신처럼 잘 감추는 사람들. 다른 사람이 방심한 사이 불리한 것들을 제거하고, 유리한 길을 신속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눈치도 빠르고 자신보다 한발 더 멀리 볼 줄 아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는 일이 봉희는 늘 피로했다. - P141

소속감과 자부심을 선물해 준 단식원이었다. 세상에서 맛본 거절, 업신여김으로 받은 상처가 여기서 치유되는 중이라고 봉희는 생각했다. 저만치 밀어낸 구유리 품으로 제 발로 성큼성큼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마음이 봉희는 두려웠다. - P152

존중받는 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시간도 존중받으며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P198

절실하면 다 돼요, 뭐든지 절실한 사람이 이기는 거야. 먹고 안 먹고를, 내가 못하면 누가 조절해요. 우리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야. 의지가 있는 사람이 그걸 죽어도 못하겠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 P200

막연한 신뢰는 이렇게도 허약했다. - P213

죽고 싶었지만 바로 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죽으면서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삶의 끝에서조차 존중받지 못할 거란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에요. - P254

사실 뒷심이 없었던 것도 늘 바깥의 목소리로만 움직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고. 정작 내 목소리를 들어준 적은 없었던 거예요. - P276

죽기 위해 들어간 단식원에서 다시 절망했던 운남. 절망했다는 건, 무언가 꿈꿨다는 것일까.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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