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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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그 질문의 울림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 있다. │p.304

지리산의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저자가 교사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삶의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덴마크의 세계 시민학교로 떠나 다시 배움을 얻는 과정이 수기로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겼다. 세계 각지에서 온 어린 학생들, 선생님들과 함께 공동의 일상을 보내면서 나누고 배우고 또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생활한다. 40의 나이로 한참 어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힘이 부칠 때, 또 자유롭지 못한 언어능력 때문에 '느린 학생'이 되어 힘들기도 했지만 그 역시 교사로서의 저자에게는 훌륭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덴마크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여행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리프레쉬 되는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에 온 학생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만큼 그들이 논의하고 배워가는 주제들은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현실적이다. 아무리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 사람에게 듣는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이점인가. 또 전혀 관심이 없어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는 과정이 참 좋아 보였다. 특히 일본 정부가 많은 역사적 사실을 교과 과정에서 숨기면서 전혀 배운 적이 없어 무지했던 일본 학생들과 위안부 문제를 나누고 이해시키는 과정은 읽는 동안 참 벅찼다. 정말 일본 정부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그 심각성이 절실히 와닿았다. 실제로 저자는 매 학기마다 새로 들어온 일본 학생들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들은 잘못 알아서 미안해하고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했다. 내가 그 학교에 갔다면 하고 생각해 봤다. 내가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내 무지함이 너무도 아찔했다.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이 모인 만큼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인식에 대해 공부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조혼과 할례 등으로 잘 알려진 나라에서 온 친구는 초반에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자국의 여성인권을 높게 평가했지만 수업이 끝날 때쯤엔 생각이 바뀌는 부분 말이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문화였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들의 문화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는데, 이런 어려움도 모두 모여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놀랍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복지에 관한 교육관은 또 어떻고. 아, 내가 한 공부는 다 뭐지.

어릴 때 나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남은 게 별로 없는 느낌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과목(수학)이 확정되고 나서부터는 그랬다. 하지만 배움 자체는 좋아해서 지금도 책을 읽을 때 벅찰 때가 있다. 나는 주로 문학을 읽으며 아름다운 문장을 탐미하는 사람이지만, 어려워도 꾸준히, 모자란 역사나 인문사회 책을 읽으며 조금씩이나마 알아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이 책은 나에게 벅찬 마음을 느끼게 해 준 배움과 나눔의 이야기지만 여행을 다녀온 기분도 들어서 어쩐지 설레고 기분이 환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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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그 시절 나는 학생이 부러웠다. 그들은 내가 받아 보지 못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 학생들을 부러워하는 교사가 학생들 앞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중학생이 교사에게 분노를 발산할 때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나도 억울하다고!‘라고 속으로 외치는 사람이 교사를 해도 될까.
- P9

나의 배움은 이들의 일상을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며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도 역시 인간이라 때로는 얼굴이 굳어지고, 감정 기복이 드러나고, 걸음걸이에서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불완전한 한 사람을 매일 밥 먹으면서 옆에서 볼 수 있다.
- P111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 한화로 2만원이 넘는 최저 임금, 주당 33시간 근무, 평균 55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세율, 촘촘하게 짜여 있는 사회 안전망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함께 노르딕 여행을 떠나게 된 두 덴마크인 선생님들은 각종 복지 제도의 혜택과 그 바탕인 조세 제도에 대해서 덴마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라 살림을 운영하는 정부를 신뢰하며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 P224

민주주의와 복지 제도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중요해. 우리가 신경 써서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거든. 요즘 자라나는 덴마크 아이들은 복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싸워 왔다는 걸 교육해야만 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지. 그 옛날 농부들이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면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이, 여성들이 나섰고, 지금은 이민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어.
- P230

이제는 나의 제자들이 부럽지 않았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먼 나라에 와서 열여덟 살 친구들 사이에서도 특히 말이 서투른 학생이 되어 보살핌을 받아보니, 내가 받아 보지도 못 했던 것을 제자들에게 주려고 아등바등했던 나 자신이 더는 처량하지 않았다.
- P258

호이스콜레의 교육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삶에 걸친 계몽, 대중 교육, 민주주의 소양 교육, 덴마크가 19세기에 호이스콜레를 만들고 지금까지 세금을 투입해 학교를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국민이 무지에서 깨어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넘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을 요구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끊임없는 재교육만이 민주적 질서로 작동하는 복지 제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게 덴마크 사람들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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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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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저술가, 비평가, 역사가,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을 읽어보게 됐다. <멀고도 가까운> 책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이 책이 내가 읽어보는 저자의 첫 책이다. 누구보다도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있는 그녀에게도 한때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억압과 폭력이 일상이었던 시간, 저자의 말마따나 비존재로서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씁쓸하게도 이 책을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뭔가 불편했다. 책 내용이 그렇다기 보다는 '페미니즘 책'이라는 것을 볼 때 늘 느끼는 감정이다. 솔직히 나는 어떤 책을 '페미니즘 책'이라고 특정 지어 단정하는 것 부터가 불편한데 누군가의 관심, 또는 주저하면서도 다가가보려고 마음 먹을 누군가의 마음을 차단하는 역효과가 분명 있다고 생각해서다. 아무리 시대나 환경이 달라도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있음에도, 이 책을 읽고 불편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 편하지 못한 거다.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거다. 여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선대의 많은 여성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반발들은 당연히 불편하지만 변화에 있어 이런 문제들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젠더에 대한 의식이 양 극단을 오가고, 심지어 '젠더 갈라치기'를 이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어떤 것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는 책에 대해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예민하게 생각하며 읽을 수밖에 없다.

현대의 페미니즘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회고록은 폭력이 가득한 일상에서 그녀가 어떤 일들을 겪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어떤 요령을 습득했으며 어떻게 책으로 도피했고 또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가로 진행된다. 말 그대로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다 읽고서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는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하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쓰고 싶지도 않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얼마나 달라졌는지. 페미니즘은 올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야 하고 분란만 조장하는 것인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목소리인지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많은 생각과 고민들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옳을 것이다. 회고록은 조금 씁쓸했다.(줄 친 곳은 너무 많지만) 지금의 그녀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백인이라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후기가 무척 좋았다. 그래서 다른 책이 궁금하다.

사람은 사실 어떤 운명도 타고나지 않는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난다. 약간의 선천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그다음에는 사건들과 만남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좌절되고, 뜨겁게 데고, 격려를 받는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이 말은 한 사람을 저지하려고 들거나 그의 성품과 목적을 바꾸려고 드는 힘들이 있음을 뜻하고, '운명대로 산다' 이 말은 그 힘들이 완벽히 성공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것은 낯선 이가 내게 건넨 멋진 운이었다. 나는 그 운을 받아들였고, 더불어 내 운명은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금 간 곳을 추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가끔은 수선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 가끔은 가장 귀중한 화물을 담아 나르는 짐꾼 혹은 배가 되는 것이라는 느낌도 함께 받아들였으니, 그 화물이란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 우리를 자유롭게 할 이야기들이다. │p.302 후기 : 생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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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폭력은 우리 중 일부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사실로 만들까 봐 걱정되었습니다. 폭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여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 P08

정의란 변천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내 시대가 사실로 여기는 가정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 최소한 그것들을 너무 과신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것들이 나를 괴롭히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138

때로는 명료하기 위해서 복잡성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 더는 줄일 수 없는 표현이 있다고 믿고, 어떤 심상을 일으키거나 환기하는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쭉 뻗은 고속도로 같은 문장보다 고불고불 오솔길 같은 문장이 좋다. 이따금 경치를 감상하려고 둘러 가거나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는 길 같은 문장이 좋다.
- P158

그런 이들이 세운 장애물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출판계는 예나 지금이나 백인들의 세계이므로, 내 성별 때문에 닫힌 문이 있었을지라도 내 인종 덕분에 열린 문도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잘 알겠다.
- P206

성장은 크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마치 우리가 나무인 것처럼, 높이를 키우면 다 되는 것처럼. 하지만 성장이란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어냄으로써 차츰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
- P238

우리는 자신을 해친 무언가를 향해 다가가기도 하고, 그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다른 어떤 것 혹은 사람이 우리를 그것으로 도로 데려간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때 디뎠던 계단이 문득 폭포로 바뀐 것 같은 그런 시간의 미끄러짐은 본디 트라우마란 것이, 그리고 트라우마가 느끼는 시간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할 때도 있다. 닫힌 것이 다시 열린다. 가끔은 우리가 그것을 새로이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수선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시 열린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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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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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나의 일관된 자세는 '이해하(려 해보)는 것'이다. 만화든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인간으로서 인간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 <관통당한 몸>을 읽으면서는 오로지 '알기 위해' 읽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었으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내려두었다.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책.

'강간'이라는 단어만 오조오억 번은 읽게 되는 이 책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 무기로의 강간에 대한 책이다. 전쟁을 다루며 전시 강간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닌 책 한 권을 오로지 전시에 일어나는 집단적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정말로 처음 접해본다. 읽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은 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책. 나 역시 그랬고 읽으면서도 힘들었다. 여자라는 생물학적 공감은 평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저절로 발휘하게 해서, 또 '강간'이라는 두 글자에 차마 다 담지 못할 잔혹성 때문이다. 특히 콩고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만 읽고 싶어졌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르완다부터 베를린까지 위안부부터 IS의 성 노예까지 전시 강간의 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았다. 목숨을 내놓고 힘겹게 내어놓은 목소리가 무색하게 전시 강간의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어이가 없다. 단순히 한 인간을 부서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 가족, 공동체, 나라를 해체하는 것임에도 막상 그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전혀 적확하지 않다.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무기로의 강간이 자행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마음은 더 무겁기만 하다. 들여다보면 전쟁의 계기는 우습다. 종교든, 이익이든, 욕심이든 들여다보면 하잘것없는데 어째서 그 피해는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럼에도 빛나는 순간은 있었다. ISIS에게 납치된 야지디 소녀들을 구해내고 있는 (실제로 많이 구해낸) '압둘라 쉬림'과 콩고에서 강간으로 장기가 손상된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목숨의 위협을 받아 가며 의사활동을 하고 있는 '무퀘게 박사'다. 양 극단으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며 한 권을 읽었다. 읽는 동안 종종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릴 때 많은 분들이 읽기가 겁난다는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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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보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목격한 참혹한 일들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의 반만 들을 때가 많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 P17

남자 판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어 했죠. 더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증거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자기들은 모르겠으니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의가 없었던 터라 저는 정의부터 내리기로 결심했어요."
- P175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 P186

강간은 신체 절단과 살인을 동반하곤 했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러시아 군대가 접근하기 전에 미리 자살하는 일이 물결처럼 퍼졌다. (...) 1945년 봄에 북부의 한 소도시 뎀밈에서만 600명이 자살했다.
- P236

고문자들이 임신한 수감자를 출산할 때까지 살려두었다가 아기를 빼앗았다니 디스토피아 소설에나 나옴 직한 사악한 일이었다. 사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시녀 이야기>에 포함된 몇몇 실제 사례를 제공했다"고 썼다.
- P262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분노가 그들의 고향을 재건하거나 그들이 겪은 고통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 P303

그건 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수법입니다. 피해자의 내면에서 사람이라는 느낌을 빼앗는 것이지요.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걸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의도적인 전략이지요. (...)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사회조직을 파괴하려는 의도지요. (...) 전쟁 무기로서 강간은 주민 전체를 몰아내고 훨씬 적은 비용으로 기존의 무기와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요.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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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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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구의 증명,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까지 정말 강렬하다. 이번 책은 재 출간되면서부터 너무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굉장히 몰입돼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다.

'간나' 이기도 '언나'이기도, 또는 '이년아'이기도 한 이름의 어린 소녀는 진짜 아빠를 가짜아빠로 만든 채 '진짜엄마'를 찾아 나선다. 황금다방의 장미 언니, 콧등치기 국수 할머니,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의 대장과 삼촌, 유미와 나리까지 소녀가 진짜엄마를 찾는 여정에서 만난 인연들도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그들에게서 이전엔 알지 못했던 사랑과 유대를 느꼈지만 결국엔 진짜를 더 갈망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린 소녀에서 점차 성장하면서, 그러니까 후반으로 갈 수록 글을 읽는 것이 더 없이 막막하고 외로워졌다. 더이상 아이는 아닌 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이 세상의 바닥으로 함께 나가떨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소녀가 누군가를 만나고 경험할수록 '진짜엄마'가 재설정되는 것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독하게 슬픈 성장이었다.

콧등치기 국수 할머니와의 이야기가 가장 좋았고, 각설이패와 동행하는 이야기까지 읽었을 때는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을 때처럼 엄청난 흡입력이라고 생각했다. 결말까지 너무 강렬했다. 이정도는 돼야 수상작이 되는구나. 요즘 내가 가장 애정하는 한국 작가님이다.

내가 너무 좋았던 것에 대해서는 쓰기가 너무 힘든데, 이 병은 어떻게 고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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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가짜 가족이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처럼 각자의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가길 바랐다.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멈추지도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멀리, 아주 머얼리.
- P14

할머니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할머니보다 앞서갔다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할머니의 시간이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오후가 반복될수록 나는 자꾸만 진짜부모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까먹었다. 그 이유를 까먹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 머릿속은 사정없이 느슨해져서 진짜엄마 생각 따위는 콸콸 새어 나갔다.
- P82

그때 처음 봤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 할머니가 웃으니까 나도 웃음이 날 뻔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하지만 웃음은 눈물과 달리 참는다고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주 조금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보고 할머니가 또 웃었다. 봄바람이 창문을 와르르 훑으며 지나갔다.
- P84

나는 할머니의 주름 속 응달까지 넘나드는 봄 햇살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진짤까? 할머니는 태워도 타지 않는 진짜가 맞을까? 진짜니까 영영 나와 함께할까? 진짜를 만나면 단번에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 P90

나는 간나. 예전 이름은 언나. 그전 이름은 이년아.
- P96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불행에 대한 예감은 실현되고야 만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불행을 자꾸 떠올리면 불행이 옳거니,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면서 냉큼 달려드니까.
- P200

그렇게 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엔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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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아파트먼트 - 팬데믹을 추억하며
마시모 그라멜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시월이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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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먼 훗날 지금의 팬데믹을 기억하며 쓴 이야기다. 마티아의 가족을 중심으로 할머니, 친구들, 이웃들이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가 배경이다. 팬데믹 당시 어린아이였던 마티아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부모는 별거 중이고 아버지는 따로 나가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는데 마티아에게 아빠는 그저 못 미더운 사람이다. 초반에 마티아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아이의 시선이다 보니 표현이 그저 귀엽다. 그런데 귀여워서 더 날카로운 것 같기도 하다. 셧다운과 함께 싫어하는 아빠까지 격리된 채 함께 지내게 된다. 마티아에게는 아주 싫고 당황스러운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게 되면서 마티아와 아빠의 관계도 변화해간다.

큰 서사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보니 흥미로웠다. 아직도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상황 속에 있는, 현실의 우리가 읽는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점이 아닐까 싶다. 예기치 않은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전 세계적으로 셧다운이 되고 혼돈 속에서 인간관계는 날카로워진다. 길어지는 팬데믹 상황은 불안감과 함께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날을 세우기도 한다. 처음엔 확진자가 한둘만 나와도 벌벌 떨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나름의 적응력을 발휘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라더니. 소소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팬데믹 속의 작은 해피엔딩을 보아서 좋았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간은 분명 흐르고 이 또한 지나갈 것임을 안다. 언젠가는 이 상황을 기억하며 '그땐 그랬지.' 할 때가 분명 올 것이라는 믿음만이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인 듯하다.⠀



* 도서지원

* 인스타그램 - @morning.bookstore



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행복했다. 내가 이 가여운 고양이의 아빠가 되는 것이다! 아빠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절대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했던 행동과 정반대로만 하면 된다.
- P25

그 뒤 몇 달 동안 바이러스가 여전히 피해를 주긴 했지만 결국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적응했다. 세상은 ‘현재‘ 안에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를 사는 동안 그 현재는 언제나 이전의 모든 현재들보다 훨씬 나빠 보였다. 그렇지만 몇 년 뒤 사람들은 왜곡된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시간을 그리워했다.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 P299

할머니, 모두가 모두에게 화가 나 있어요.
- P134

마티아, 사랑은 춤이야. 인생은 항상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지.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출 때는 상대의 발을 밟지 않으면서 변하는 박자에 맞춰야 해. 두 사람에게 계속 춤을 출 힘을 주는 이유를 찾으면서 말이야.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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