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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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나의 일관된 자세는 '이해하(려 해보)는 것'이다. 만화든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인간으로서 인간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 <관통당한 몸>을 읽으면서는 오로지 '알기 위해' 읽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었으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내려두었다.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책.

'강간'이라는 단어만 오조오억 번은 읽게 되는 이 책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 무기로의 강간에 대한 책이다. 전쟁을 다루며 전시 강간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닌 책 한 권을 오로지 전시에 일어나는 집단적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정말로 처음 접해본다. 읽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은 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책. 나 역시 그랬고 읽으면서도 힘들었다. 여자라는 생물학적 공감은 평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저절로 발휘하게 해서, 또 '강간'이라는 두 글자에 차마 다 담지 못할 잔혹성 때문이다. 특히 콩고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만 읽고 싶어졌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르완다부터 베를린까지 위안부부터 IS의 성 노예까지 전시 강간의 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았다. 목숨을 내놓고 힘겹게 내어놓은 목소리가 무색하게 전시 강간의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어이가 없다. 단순히 한 인간을 부서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 가족, 공동체, 나라를 해체하는 것임에도 막상 그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전혀 적확하지 않다.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무기로의 강간이 자행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마음은 더 무겁기만 하다. 들여다보면 전쟁의 계기는 우습다. 종교든, 이익이든, 욕심이든 들여다보면 하잘것없는데 어째서 그 피해는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럼에도 빛나는 순간은 있었다. ISIS에게 납치된 야지디 소녀들을 구해내고 있는 (실제로 많이 구해낸) '압둘라 쉬림'과 콩고에서 강간으로 장기가 손상된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목숨의 위협을 받아 가며 의사활동을 하고 있는 '무퀘게 박사'다. 양 극단으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며 한 권을 읽었다. 읽는 동안 종종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릴 때 많은 분들이 읽기가 겁난다는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침서가

인스타그램 - @morning.bookstore


전쟁 보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목격한 참혹한 일들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의 반만 들을 때가 많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 P17

남자 판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어 했죠. 더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증거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자기들은 모르겠으니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의가 없었던 터라 저는 정의부터 내리기로 결심했어요."
- P175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 P186

강간은 신체 절단과 살인을 동반하곤 했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러시아 군대가 접근하기 전에 미리 자살하는 일이 물결처럼 퍼졌다. (...) 1945년 봄에 북부의 한 소도시 뎀밈에서만 600명이 자살했다.
- P236

고문자들이 임신한 수감자를 출산할 때까지 살려두었다가 아기를 빼앗았다니 디스토피아 소설에나 나옴 직한 사악한 일이었다. 사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시녀 이야기>에 포함된 몇몇 실제 사례를 제공했다"고 썼다.
- P262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분노가 그들의 고향을 재건하거나 그들이 겪은 고통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 P303

그건 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수법입니다. 피해자의 내면에서 사람이라는 느낌을 빼앗는 것이지요.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걸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의도적인 전략이지요. (...)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사회조직을 파괴하려는 의도지요. (...) 전쟁 무기로서 강간은 주민 전체를 몰아내고 훨씬 적은 비용으로 기존의 무기와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요.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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